머릿속까지 얼얼했던 느낌을 불러오다
여름의 절정
어려서부터 바닷가에 늘 붙어살았던 탓에 무더운 여름이면 산보다는 바닷물에서 더위를 식혔던 내가 성인이 된 후 딱 한 번 산의 계곡물에 발을 담근 적이 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무더운 8월의 초입이었다.
내리쬐는 태양빛은 눈이 부시다 못해 검은 눈동자가 하얗게 표백이라도 될 듯 강렬했고 한낮에 그 태양 빛 아래 있는 것들에 눈을 잠시라도 주고 난 후면 눈은 실명한 것처럼 앞이 깜깜해지곤 했다.
누가 산 계곡에 가자고 먼저 제안을 했는지는 모른다. 젊은 남녀 서너 명이 준비도 없이 떠난 거였다.
단 맨땅에 깔 것 한 개와 산 아래에서 수박 한 덩이를 샀다.
산 아래서부터 차를 타고 산 허리까지는 오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올라간 계곡 입구 주차장에는 밀려든 차들로 만원이었고 차를 겨우 세우고 우거진 나무 사이사이 계곡물이 흐르는 곳으로 갈 때까지도 왜 이 더운 계곡을 찾아왔는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유명한 계곡이라 그랬는지 소나무 사잇길로 지나갈 때는 땅이 사람들 발걸음에 벗겨져 맨들맨들하게 닳아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을 앞으로 뗄수록
어디선가 계곡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무더워서 지쳐가던 심장에 물방울들이 하나 둘 튕겨져 오는 것 같았다.
저 가까이 소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로 물에 젖은 바위들이 보이고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선선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드디어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시냇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자리를 깔고 해서 우리는 앉을자리를 찾느라 한참을 물따라 도로 내려와야 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니 머리를 감고 튜브를 타는 위쪽과는 달리 아래에서는 그 물로 밥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로 단단해져 벌건 흙이 드러난 곳 옆 비스듬한 큰 바위 위에 겨우 자리를 잡고 할 때도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계곡물에서 샴푸로 머리를 감는 사람들이 못마땅하기만 하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들고 온 수박 한 덩이를 물이 흐르는 돌 사이에 내려놓고 자리를 편 뒤
양말을 벗고 맨발을 계곡물에 무심하게 집어넣었다.
아. 아. 아.
어떤 감각을 머리로 느끼기도 전에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내 발을 순식간에 감아 돌며 내려갔다. 그리고 동시에 뜨거웠던 심장이 얼음 사이다에 담근 것처럼 쏴하게 식고 잠시 후 몸의 달구어진 세포들마저 흐르는 물에 쓸리며 스러져갔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발을 쓸고 내려간 물은 저 멀리 달아났고 한편 위에서는 또 시원한 물줄기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내 발아래로 모여들었다가 흩어지곤 하였다.
아.. 기분 좋다. 시원하다....
오는 내내 찡그렸던 얼굴이 펴지고 온 몸이 나른해지면서 발을 담근 모두가 말없이 물속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계곡물에서 장난을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할 뿐.
태양빛에 피부 껍질을 태우며 짠물을 들이키던 바닷가 수영과는 사뭇 다른 , 바닷물이 물이랑을 이루며 달려들 때 물 그네 위에 몸을 던지는 그 강렬하고 뜨거운 바닷가도 멋지지만
한없이 흘러가는 물소리의 조잘거림들과
발을 쓸어주는 부드러운 물줄기들의 손놀림과
나무들 위에서 단체로 비벼대는 벌레들의 날갯짓들과
가려진 나무 잎사귀 사이사이로 언뜻 비치는 하늘을 보며 눈을 감을 때
온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낼 힘을 얻은 것처럼 처졌던 몸이 싱싱하게 살아 오름을 느꼈다.
그 힘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 전까지 말만 꺼내면 짜증으로 돌변할 것 같아 묵묵히 참던 대화를 꺼내기에 충분했다. 수박을 잘라먹을 때는 서로 크게 웃고 나중에는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옷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놀았다.
다시 휴가를 간다면
저녁해가 지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을 것이고
사람은 좀 띄엄띄엄 있으면 좋겠다.
계곡에 간다면 장사꾼들이 평상을 펴 놓지 않은 나무 그늘이 진 넓적한 바위에 앉아 조용히 발을 담근 체 눈을 감고 속세에 찌든 것들을 하나하나 씻고 올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올여름에는 바다도 계곡도 못 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