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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Aug 08. 2016

#예수가 목표


  변함없이 오늘도 눈뜨자마자 집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가 목마르게 한다. 왁자하게 들어오는 벌레소리가 한결 더위를 가셔주는 아침이기는 하지만 거울을 보니 밤새 틀어놓은 선풍기 바람 탓인가 얼굴이 부었다. 얼음찜질을 할 겨를도 없이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뻐근한 몸을 좀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담임이 없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꾀를 부릴 수가 없다.

교회까지는 겨우 한 정거장. 교회 문 입구까지 가는 데도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다 뜨거운 증기가 되어 오르는 듯하다. 나무들도 바람을 바라고 섰는지 가지가 늘어져 있다.  오전이라 그늘도 시원하지 않고 연못의 고기 들도 꼼짝을 안 하네.

하늘은 파란색과 흰색을 섞어 붓으로 휘갈겨 놓은 듯하고 거리에는 차가 뜸하다. 이제 정오가 되면 이 한낮의 거리는 사람들을 더위 먹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생수통 있는 곳으로 먼저 걸음을 옮기고 있다. 나도 시원한 물 한 컵을 받아 마셨다. 좀 살 것 같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군데군데 자리가 비었다.

일요일에 다들 늦잠을 자느라고 한가로운 아침을 보낼 그 시간을 깨워 온 아이들은 찬양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마칠 때쯤 해서는 늦게 온 아이들까지 거의 다 찼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은 후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부끄러운지 어색한 몸짓을 하는 아이들을 앞으로 나오게 한 뒤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하게 했다.

고3 학생들을 위해 케이크를 준비하고 용기를 주는 교회 사람들의 작은 메시지가 적힌 페이퍼를 줄 예정이다. 한 여학생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다. 작년 까지만 해도 중고등부 찬양을 인도했던 아이다. 교회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학생.  믿음이 큰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아이는 웃으며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떤 대학 어느 과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거고 저희 부모님들이

그런 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말을 맺을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뭔가 울컥했나 보다.

가끔씩은 그 여학생의 엄마를 통해 " 공부할 중요한 시기에 너무 교회일에만 신경을 써서 걱정이다."라는 말을 들어온 나로서는 퍽 놀랄만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엄마는 그래도 아이가 좀 더 좋은 성적에 좋은 대학을 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딸은 철저히 예수님 안에 있음을 저렇게 증명해 주었다.

그렇구나. 저 아이는 정말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구나.

 그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체 맺지 못한 것은 복합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성령의 감동도 부모와의 갈등도 다 함께.

나는 세상 속 아이들과 다르게 그 아이의 삶의 목표가 예수인 것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물론 예수를 믿는 학생들이 가져야 할 당연한 것이지만.

사춘기 아이들을 데리고 교사를 하다 보면 신앙의 깊이나 연수가 다르고 또 그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그래서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감싸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특히 제일 힘든 것은 아이들의 삐딱함에 대처하는 것과 학교 성적에 민감한 아이들이다.

우리 교회 특히 내가 맡은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만 해도 학교 성적에 매우 민감하고 부모들은 더 그러하다.

예배를 학원 때문에 빠지는 것은 예사고 믿음의 부모 안에 있는 아이들 조차 학원 수업에 학교 자습시간에 쫓겨 예배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 아니 지키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오죽하면 목사님조차 예배 시간에 참고서를 가져오지 말라고 할까.

그러나 그런 아이들 속에서 소수의 아이들은 예배 시간을 그 어느 것보다 소중히 하며 지켜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어른인 나조차 부끄러워질 때가 있고.

아침에 한 여고생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직도 쟁쟁한데  저녁 늦게 교회 교사들 단톡 방에 사진 한 장이 떴다.

낼부터 일주일 간 새벽 기도와 금요철야 기도를 한다는 두 남학생의 사인이 들어간 종이였다.

줄공책을 찢어서 서로의 약속을 적고는 그 종이를 양쪽에 잡고 수줍게 웃고 섰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아이들은 그들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사들 톡 방에 올려달라고까지 했다 한다. 더 웃음이 터지는 것은  아래 증인의 사인도 있고 많이 나온 친구에게  다른 친구는 소원 한 개를 들어줄 것이고 밥 한끼를 사주기로 한다.



반면 내게로  수업하러 오는 아이들의 지친 얼굴이 겹쳐진다. 그들은 경쟁이라는 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서 늘 그곳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좀 더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하고 또 밤잠을 줄여가며 성적을 올려야 한다.

부모와 의견의 대립이나 갈등이 있어도 풀 대상이 없다.

스트레스와 불안 그 속에서 부대끼느라 힘들다.

믿음을 가진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해 많이 여유롭다. 나의 자식이 나 개인의 소유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려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진다. 그러나 세상의 부모들은 오로지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 하는 현실 때문에 아이들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재촉하고 몰아간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아이들은 세상 속 아이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환경에 사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교회에서는 오로지 예수만이 기준이기에 믿음이 큰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일 뿐. 세상의 가치는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창 사춘기 때 아이들의 불안정한 심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쁘게 빚어주는 곳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예배 시간에 늘 늦게 오고 껌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고 친구들과 설교시간에 잡담을 하던 한 학생이 있었다.

올 초에 수련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오더니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수련회 연극에서 성경 인물 '스데반' 역을 했는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지는 연기를 기가 막히게 했고 구경하던 아이들과 교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후 그 아이는 조금씩 서서히 변해갔다. 강단에 서서 찬송을 하기도 하고 또 간식을 스스로 나눠주기도 하는 등. 표정도 밝아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수련회에 돌아온 후 지금까지도 스데반의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 아이와 마주칠 때마다 "스데반"이라고 부르는데 본인은 그런 호칭이 싫지 않은 표정이다.

사춘기를 지나며 한 영혼이 삐뚤어져 갈 때 상처받은 영혼은 비싼 심리학 상담으로도 완치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완벽하게 새로 변화하는 순간들이 있는 곳.

한 아이가 이렇게 예배와 말씀 안에서 바르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교회 안이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가치보다는 예수가 목표인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예수 안에서 내 믿음을  어떻게 보일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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