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1장
25절-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이번에 태풍 차바로 인해 해안가 아파트 단지로 바닷물이 넘어오는 것을 보면서 문득 위의 말씀이 떠올랐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듣고 혼란스러워하며 이때가 곧 예수님이 오실 마지막 때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동안 이 세상의 마지막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태평스럽게 흘러갔고 인생의 마지막만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계속 이어져 왔을 뿐이다. 또한 언제나 태풍은 있었고 수재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바닷물이 인간이 사는 구역을 침범한 일이 요 몇 년처럼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태어난 이후만 보아도 그러하다.
밀물 썰물이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경계선을 지키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하였었는데. 일본과 동남아에서 일어났던 바다의 침략을 보면서 바다에 내려졌던 경계선이 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바다란 정말 깊고 깊은 포용력으로 나를 끌어안아주던 안식을 주는 대상이자 휴식의 공간이었다.
한껏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 수평선 바다가 보이는 자갈 마당에 앉아 하염없이 찰랑이는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닷물 소리를 듣다가 오고는 하였다.
특히 태풍이 지나고 난 직후의 바다는 성난 고래처럼 너울이 크고 거칠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퍼렇게 변한 바닷물의 칙칙함에 물보라는 맥주 거품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그렇게 심한 파도도 육지의 경계선. 즉 내가 서 있는 땅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다만
평평하게 타원형을 이루며 깔렸던 자갈들이 한껏 밀려 자갈밭은 좁아지고 그것들은 한껏 덩어리져 모여있곤 했다.
그때도 바다를 보며 위안을 얻었으면 얻었지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철썩이는 바닷물 소리와 자갈을 긁어내리는 소리는 오히려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고 가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가파른 곡선을 이루며 달려오는 바다가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절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바다는 위협적이다 못해 믿을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 쌓아 올린 바벨탑은 한없이 무력하다.
태풍 차바가 우리 지역을 통과할 때 밤새 웅웅대는 바람 소리가 가까이 있던 바닷물 소리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시달렸다. 얼마나 비가 창을 두드렸던지 아침에는 빗물이 베란다 안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어떻게든 창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태풍의 잔재 같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도 태풍이 지날 때 온 땅을 긁어대던 바람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오싹했던 날들이 잊히지 않는다.
오늘
다른 나라에서도 태풍으로 인해 먼 길을 떠나는 차량들의 행렬과 허리케인으로 가로수의 나무들이 막 뿌리째 뽑힐 듯 미친 듯이 옆으로 누운 것을 보았다. 바람이 얼마나 세었는지 동영상 화면에서조차 바람의 색깔이 보였다.
강력한 흰 붓터치를 보는 듯한 허리케인의 속력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것이 지나간 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매년 자연재해는 더 강력해지는 느낌이다.
바다도. 바람도. 땅도. 하늘도.
어디에 몸을 두어야 안전할지 모르겠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정말 성경에서처럼 마지막 자연의 경고일까. 징조일까.
이러한 자연의 징조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의 재미에 빠져 살거나 삶의 염려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징조들의 이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안일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가 아닐까.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