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샘솟는 생수
: 물동이를 내려놓고 싶지만 생계 때문에 그럴 수 없다.
파이프 라인을 만들어라. 그러면 매일 물을 져 나르지 않아도 물이 쏟아진다.
정말 그럴 듯 해 보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매일 물동이를 져 나르는 일상도 버겁지만 파이프 라인을 만드는 것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단기간에 자신의 자산과 시간과 인맥을 도려내야 하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희생 뒤에 거대한 파이프 라인을 만드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설령 파이프 라인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이 구멍이 날까 노심초사하여 지속적으로 그 라인을 부여잡고 관리해야 하는 부담과 고초가 따른다는 것도 무시 못할 일이었다. 누가 먹고사는 문제에 자유하다 말인가.
나는 예전에 뭔가 대단하고 거창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일들을 시도해보려고 했었던 적도 있었으나 내가 가진 달란트를 가지고 버티는 것이 오히려 더 쉽다고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승준 목사)이 우리가 매일 지는 물동이의 고통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설교할 때 반복된 일상의 괴로움을 물동이의 저주와 연결을 시키지 못했구나 하는 내 어리석음을 마주하였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들을 자꾸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만 보았고 또 보고 있지는 않은 건가 하는 인식과 함께였다.
창세기 3장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거의 공감할 터이지만
일이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기보다 목구멍에 풀칠을 해야 하는 생계의 문제에 더 밀접한 것이라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란 고되고 지겹고 버겁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들에게 학교를 반드시 다녀야 하고 또 공부를 잘해야 하고 또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사람구실 한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다들 같은 세상에서 동일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기에 잘못된 세상의 가르침을 깨뜨려 줄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고. 또 나 스스로도 이 세상의 틀을 깰만한 지성도 용기도 부족하였던 터라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지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성적만으로 아이들을 구분 짓는 학교에서의 경쟁구도와 세상에 나와 또 부당하게 보이는 어떤 벽에 부딪히면서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하지만 이미 걸어왔던 길을 돌아서 가기에는 늦었다는 생각만이 들기 마련이고 설령 이미 알았다손쳐도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 안에서 개인이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뒤늦게 깨달은 자신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며 무거운 물동이를 지고 반복적인 일상을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삶 속에서도 세상 곳곳에 물동이의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유혹이 지친 사람들을 꾄다.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일을 해도 결국 자신이 속한 회사나 세상 속에서 노예같은 삶을 살다갈 뿐임을 인식하거나 이렇게 살다가는 세상의 부요함은커녕 가난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들고 있던 물동이를 버리고 그 속삭임에 빠져 물동이의 무게보다 더한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일도 허다하다.
차라리 물동이를 버리고 자신의 일을 찾아 떠나거나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실행하는 자들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깟 물동이가 뭐라고.
그러나 물동이가 우리의 목숨을 압박하는 것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성경은 말한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던 그 순간부터 인간은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저주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저주를 풀까?
세상의 가르침은 일하지 않아도 물이 흘러드는 파이프 라인을 만들어라. 재테크를 하라. 자기 계발을 하라 등등 수많은 방법들을 제시하곤 한다. 거대한 바빌론의 세상. 맘몬의 세상에서. 세상은
인간을 괴로움의 노역에서 해방시켜줄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그 저주를 풀어줄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이다.
이승준 목사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물동이의 저주가 풀렸고 삶의 우선순위가 물동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고 해석하였다.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참조)
요한복음 4장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절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기서 여자는 그토록 소중히 하던 물동이를 예수님을 만난 이후 소중히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물동이를 버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닫고 마을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가진 생업을 버리고는 먹고 살길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면 영적 생수를 먹고 영생을 누리는 축복을 받는다. 다만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고 그 육체의 짐은 짊어지고 가야 하고 또 그 육신의 생명을 위해 물동이의 물을 마시려면 우물가에 가서 반복적으로 물을 져 날라야 한다. 세상은 그 물동이를 버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물동이를 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누군가가 그들의 주장대로 파이프 라인을 만들어 물동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해도 육체적인 삶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물며 돈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주관적 만족도나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고작 1년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고 해서 돈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돈은 필요하고 또 그것이 없으면 정신마저 피폐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위안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물동이의 무게를 힘들어할 때 주님은 우리의 짐을 져 주시며 물대는 고통 속에 놔두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햇볕이 들지 않는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적절하게 비를 뿌려주시며 갈증없이 살아가도록 하신다.
나일강가의 비옥한 토지에서 많은 생산을 하고 부요한 삶을 살지라도 물대는 고통 없이는 수확물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 자신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가족들과 얼굴 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 뒤에 후유증으로 남던 건강문제와 자녀와의 소통의 단절 등등은 힘들기만 하였다. 돈을 버는 만큼 일하는 시간의 양도 불어나서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다 마칠까하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였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무척 심했던 셈이다.
그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돈을 소비하는 쪽이었기에 적게 벌고 적게 쓰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나는 나일강가에 토지를 소유했던 사람과 같았으나 매일 물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된 이후 우선 순위는 예수님이 되었고 예전처럼 돈 버는 일에 급급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씩 단비같은 주님의 은혜를 값없이 맛보고 부족하다 싶으면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며 그렇게 살다보니 많이 느긋해졌다. 물론 삶의 두려움이나 염려가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때론 탐심이 일어나 하던 일을 겸해 수입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사업을 투잡으로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해오던 일을 계속하며 주님의 은혜에 의지해 살리라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