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by 미셸 오


누가 산에서 주운 거라며 밤을 한 봉지 주었다.

그것을 씻어서 솥에 앉히고 돌아서니 식탁 유리 위에 밥풀이 붙어 있길래 자세히 보니 밤벌레였다. 퉁퉁하니 하얗게 부푼 벌레를 보니 미처 바깥을 탈출하지 못한 솥안의 벌레들이 생각났다. 밤 먹을 생각이 쏙 들어갔다. 죽은 듯 식탁모서리에 달라붙은 벌레 두 마리를 휴지를 두껍게 해서 겨우 싸서 버렸다.

이런 애벌레를 보면 중학교 때 친구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반 친구는 집 마당에서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았다.


비가 내린 오후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바깥 세면대 위에 빨래가 담긴 세숫대야가 있는 것을 보고는 하이타이를 뿌린 후 손을

넣고 빨래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눈으로는 저 멀리 검었다 파랬다 하는 바다의 물결을 바라보고 또 가까이는 차도를 지나는 차들과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한참 인기 있는 보니엠의 바빌론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세숫대야 안의 빨래는 그녀가 바라보는 풍경을 더 아름답게 보여주는 악기와도 같았다. 아니면 어느 순간

손안에 느껴지는 감각적 부드러움에 푹 빠져서 시선에 들어오는 풍경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폈던 것이리라.

자신은 저 멀리 바빌론의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했고. 매일. 넉넉지 않은 집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신은 진짜 멋지고 부자인 부모들과 불행하게 헤어진 후 못된 부모에게 걸려든 불쌍한 소녀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녀는 언젠가 진짜 부모를 만나 이 집을 떠난다.

손 안의 빨래는 정말 부드럽고 질기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점점 부드러워지는 그것이 물에 녹아진 하이타이의 부드러움이고. 깨끗하게 씻긴 빨래의 감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비에 말갛게 씻긴 아름다운 바깥세상은 거대한 백색 스크린이 되어 그 속에서 부자가 된 자신이 자신을 키워준 부모들에게 집을 사주는 장면에까지 도달했다.

상상 속에서도 현실의 부모는 배신하기에는 너무 불쌍하고 가난했던 것이다.

그 순간 차의 경적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크게 울리고 지나갔다. 그것은 그녀가 보던 백색 스크린이 유리처럼 깨지는 것과도 같았고 그녀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평범한 소녀로 돌아온 신데렐라는 자신이 그토록 주물러 빤 옷을 헹궈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잡고 있던 그 옷이 지나치게 가늘고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친 그녀의 눈은 커다랗게 변해버렸고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자신의 더러워진 손을 씻을 겨를도 없이 그 손으로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그 세숫대야 안에는 너무나도 하얗게 표백된 커다란 지렁이가 축 늘어진 몸으로 그녀의 손 안에서 빠져나와 있었던 것이다. 비가 내릴 때 한 마리의 커다란 지렁이가 비를 타고 그 세숫대야 안으로 들어갔고. 빨래 아래 감춰졌던 그것을 소녀는 확인할 겨를도 없이 상상 속을 헤매느라 눈치를 못 채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하얀 거품 속의 미끌대는 손 안의 감촉이 부드러운 비누거품 외의 다른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때 친구의 손 안에서 거의 형태가 변해버린 커다란 지렁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졌다.

그 시절에는 지렁이가 길고 퉁퉁했었다.

비 온 후 아침 등굣길은 땅에서 밀려 나온 지렁이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나는 그 지렁이들을 밟지 않으려고 고함을 빽빽 지르면서 폴짝폴짝 뛰다시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아이들은 지렁이가 유익한 벌레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잡고 흔들기도 하던데... 꿈틀거리는 모양체는 그냥 꺼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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