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by 미셸 오

세월의 거친 바람이 그녀의 겉모습을 깡통처럼 찌그러뜨렸다.

흑백사진 속의 그녀, 나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젊다. 그 사진 속에서 나의 닮은 꼴을 찾다가 그때 그녀의 유전자 안에 있었을 나라는 작은 개체를 떠올려본다.

그렇다. 그녀의 쌍꺼풀 없는 검은 눈이 내게로 왔다. 검고 숱 많은 머리칼도.

언제부터인가 나는 40살의 여인도, 50살의 여인도, 60살의 여인도, 70살의 여인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많이 살았다고 해서 세상의 무대에서 은퇴하는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은퇴하라고 무언의 강요를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젊음에 열광할 때 소외된 늙음에 고개를 돌리니 곳곳에 아름다운 우리보다 먼저 시간여행을 해왔던 많은 여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많은 여자 들중 나의 엄마도 한 사람의 객관화된 여인, 한 사람의 나와 동등한 여자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 70세의 엄마에게서 젊은 나를 보았다.

75세의 여자가 셀프서비스 커피를 마실 때와 65세 여자가 단발머리를 했을 때 그들의 젊음을 만난 다. 언젠가 진주 가게에 갔을 때 그 안주인 여자의 단발머리는 그녀의 남편이 사모아 섬에서 수집해 왔다던 진주 빛깔처럼 빛났다. 은색의 단발도 검은 머리처럼 찰랑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 머리숱이 좀 있어야겠지만.

몇 년 전 호주에 갔을 때 키 작은 60 중반의 여자가 커피색의 앞치마를 가뿐히 둘러메고 식사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그 집의 샌드위치 맛이 특별할 것이라 확신했고 정말 그랬다. 그 이후로 나는 아보카도 샌드위치 광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나 태어난 시간의 거리는 그들의 눈에 담겨있다.

주름진 얼굴 사이로 깊어진 늙은 -아니 우리보다 먼저 시간의 선을 밟아간- 여인의 눈 속을 바라다보면 깊어진 그들의 내면을 마주한다. 그들의 고통만큼이나 눈은 백가지 색깔로도 표현 못할 깊음이 있다. 이런 것이 나이가 아닐까? 그래서 몇십 년의 시간 밖에 서서 흘리는 그녀들의 눈물은 우리의 가슴속 우물을 길어 올린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살아온 시공간 속에서 마주한 고통의 눈물들이 고여있게 마련이니까.

희생의 불사조였던 엄마는 신이 정의한 사랑의 의미를 잘 실천하였다. 엄마는 절대 늙지 않은 싱싱함으로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아침 드라마의 내용을 내게 늘 들려준다. 지금도... 그러나 나는 허생원의 첫사랑 이야기를 못 들은 척 맞장구치는 조선달 같은 위인이 못된다. 그래서 가끔 짜증도 낸다.

그러나 엄마는 이제 50세의 딸이 친구처럼 자신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엄마의 의식구조는 엄마라는 존재감에서 나와 동일하다. 나 역시 20대의 딸이 있으니까.

이 넓은 지구별에서 엄마와 딸로 만나서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다.

70년 세월의 장막을 열면 그 무대에서 펼쳐진 삶이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커 보인다. 열 개의 기쁨보다 몇 개의 큰 비극들이 엄마를 진창으로 끌고 가곤 했다. 나는 고통 속에 있는 엄마에게 더 큰 고통을 가하기도 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왔다.

엄마는 나보다 일찍 세상에 나왔고 내가 그 다음, 그리고 내 딸이 그 다음으로 나타났다. 누구든 한 여인의 육체를 찢어야만 비좁은 자궁은 탈출할 수 있다.

엄마도 나도 육체를 찢기는 순간 엄마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선상에 서 있다. 나는 앞으로 20년 후 늙고 힘없는 노년이 아닌 먼저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뒤따라오는 젊은 사람들을 내 변함없는 젊음으로 맞이할 것이며 나보다 먼저 걸었던 엄마들의 젊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먼저 온 순서든 아니든 또 하나의 작은 세상을 하나 둘 떠나갈 때 이 세상 밖에서 우리를 안아줄 또 다른 엄마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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