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다주신 <새 소년>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는 겉표지만 봐도 얼마나 가슴이 설렜던지 모른다.
그 잡지 속 많은 이야기들과 다양한 만화들을 통해 세상 속으로 한 발씩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종이가 닳도록 친구들과 돌려 보고 다음 달 새책이 나올 때까지 정말 가슴이 아프도록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잡지책에서 보던 만화를 영화를 만든다 하니 남동생과 나는 잠을 못 잘 만큼 그 만화영화가 보고 싶었다.
<로봇 태권브이>의 그 멋진 모습. 그것은 만화 속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에겐 실제와도 같았다. 우리의 바람 덕분인지 쉬는 날이면 거의 잠을 자야 하는 아버지가 일요일에는 꼭 그 영화를 보러 가자고 약속을 하였고 우리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막상 일요일에 되자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우리 오누이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어른이 되고서야 아버지의 노동 후 피곤함이 자식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당시 어린 마음에는 약속을 안 지키는 아버지가 내내 못마땅하고 서러웠다.
나는 어려서부터 만화 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동네 만화방에 용돈만 생기면 종일 앉아서 만화를 읽는 그 순간들은 시간이 하염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오죽했으면 만화방 주인 아줌마가 내게 가게를 잠시 맡기고 갈 정도였던 것이다. 빈 종이의 면만 보이면 늘 책에서 본 만화 주인공들을 따라 그렸다. 부모님이 그때 길을 좀 터주었다면 아마도 만화 쪽으로 직업을 삼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화 이야기를 길게 끄집어낸 이유는 몇 달 전에 읽었던 만화를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글로 쓴 이야기보다 더 깊은 내용의 감동적인 만화들을 즐기는 편인데 이번에 읽었던 김은성 씨의
< 내 어머니 이야기>가 그렇다. 4권을 사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밤을 새워 읽었다. 옛날 베스트셀러 소설 <동의보감>을 읽었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우리 할머니가. 어머니가 겪었던 삶을 글로 적어보고 싶었다. 내가 들었던 그리고 가까이서 보았던 여인들의 삶이란 정말 고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작가가 내 나이 또래여서 인지 그녀가 보여준 할머니. 어머니의 삶은 나의 어머니 할머니 세대가 걸어왔던 삶과 많이 닮아 있었다.
다만 만화 속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북한이 고향이어서 그곳의 사투리와 인심. 그리고 피란길의 힘든 삶 등은 또 다른 특수한 것이어서 흥미로왔다.
만화를 직접 보면 느끼겠지만 이 만화의 그림체가 먹물로 그린 듯하여 그림 속에 더 깊이 빠져드는 효과를 준다. 또 세련되게 잘 그린 그림이 아닌데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도 있다. 만화 주인공들의 인물들의 구분은 입술 모양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주로 캐리커처를 방불케 하듯 얼굴의 절반이 입술인데 네모 또는 동그라미로 입술이 과장되어 있다. 이름들도 특이하다. 놋새. 도화선. 귀동녀. 이초샘.
작가의 어머니는 이름이 놋새이며 외할머니 이름은 이초샘이다. 주로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핵심을 이룬다.
총 4권 중 첫권은 외할머니 이초샘 이야기로 시작된다.
1900년대 초 함경도 어느 마을이다. 그녀는 열여섯에 시집와서 첫째 딸을 낳고 홀 시아버지와 어린 시누이 둘과 남편과 자꾸 불어나는 아이들을 거두며 살았다. 게다가 농사일에 조상의 제사까지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게다가 까탈스러운 시아버지는 말 한마디를 해도 빈정대기 일쑤고 수시로 음식 타박을 하며 며느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편은 아내를 아꼈다. 그리고 그녀의 4대 독자 외아들과 딸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그녀는 시아버지의 입에 젖을 물려 겨우 살려냈으나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자식들은 다 자라 시집 장가를 가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았다.
자식들의 성격도 다 다르고 그들의 삶도 달랐다.
특히 큰딸 도화선이는 무척 욕심이 많은 딸이었는데 그 딸이 죽었을 때 엄마 이초샘이 기절을 하고 깨어나지 못했다. 이때 복동녀 (놋새)가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내고 자신의 몸에 이가 바글바글 하도록 지극정성으로 엄마를 보살펴 살려낸다.
이 장면에서 나는 무척 슬프게 울었다. 우리 엄마가 아파서 정신을 못 차릴 때 나는 내 육신의 피곤함에 젖어 엄마를 살려내지 못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서였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놋새는 마음에 둔 남자와 결혼을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들던 남편도 살다 보니 정이 들고 아이들도 낳게 되었지만 남편은 퍽이나 놋새의 애를 먹인다.
놋새는 6.25를 겪는다. 전쟁 중에도 동네 버릇없는 것들이나 빨갱이 짓을 할 뿐이지 인심 좋고 평화롭던 놋새네 고향마을은 늘 따뜻하였다. 항상 음식을 풍성하게 해서 가족들은 물론 손님들을 접대하던 풍속도 그렇고 함경도 사투리가 그렇게 부드럽고 예쁘다.
함경도에서 거제도로 피란을 와서 사는 내용도 실제 겪었던 삶이라 긴장감 넘친다. 작가가 엄마(놋새)의 구술을 받아 적는 형태로 만화를 그렸음을 마지막 권에서 확인된다.
개인 적으로는 이초샘 이야기를 그려냈던 1권과 2권이 재밌었다. 주변의 독서모임에서도 이 책을 사서 읽고 서로 느낀 점을 나누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