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년 고 3학년이 되어 살다 보니 몸이 여기저기 망가지기 시작했지만 자소서를 쓰던 시점에서는 죽을 만치 힘이 들었다.
특히 엄마들의 욕구를 만족하기가 힘들었다. 요즘 엄마들은 인터넷 정보들을 너무 많이 섭취해서 배만 불리다 보니 직접 자소서를 지도하는 내게 간섭하는 일이 좀 있었더랬다. 그래서 한 번은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고.
11월 수능이 다 마쳐지고,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마치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고맙다고 한 엄마는 두 명이었다.
아직 수능 결과도 있기 전이었다.
나는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의 아이를 가르쳐준 선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엄마들의 인격에 감동한다.
분명 그런 엄마의 품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세상에 맞서는 힘도 클터이다.
수능점수가 발표되고 사실 국어 최저점이 궁금했지만 학생들의 연락이 먼저 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에 수능 국어가 내가 판단하기에는 어렵게 느꼈기 때문이다. 국어 점수로 인해 수능 최저를 못 맞추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마음이 졸아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하나 둘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명문대학에 합격한 아이들.
그러나 합격한 대학은 원하던 학과가 아니어서 합격한 대학을 포기하고 재수를 택했다는 한 여학생의 전화를 받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 아이의 그간의 노력과 고생을 알기 때문이다.
그 여학생이 포기한 그 명문 대학에 어떤 아이는 추가 합격이라는 행운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여학생의 10개월 후 원하는 대학의 학과 합격 소식을 소망해 본다. 1년의 재수 경험이 훗날 훌륭한 판사가 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으며.
두 번째는
내게 2년 전 처음 왔던 남학생이다. 처음 가르칠 때부터 머리가 똑똑했다. 수업시간에 늦을 때 가끔 축구를 하다 왔노라면 땀을 흘릴 때가 있었다. 축구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면서. 그러다 공부에 차츰 재미를 붙이더니 축구를 하지 않고 전화도 구식 폴더폰을 들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시점이었다.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3학년에 와서는 전 과목 1등급에 가까운 성적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지나쳤던가. 수능 점수가 9월의 점수보다는 많이 낮게 나왔다. 그래도 서울의 명문대학에 두 곳이나 합격 후 나에게 인사를 하러 들렀다. 빵을 사들고. 내 인생에 이런 순간이 가장 기쁘고 보람이 난다. 남학생은 나중에 대학 입학 전에 한 번 더 들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입학 선물로 무엇이 좋을지 고민한다.
세 번째 역시 내게 2년간 꾸준히 배워온 남학생이다. 첫인상이 피부가 창백하리만큼 하얗고 키가 길쭉하니 컸다. 키다리 아저씨의 그림자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난항이었다. 자유분방하게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는 식의 가정 안에서 큰 학생 같았다. 무엇인가 질문을 하면 처음 들어본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열심히 가르친 결과 어느 날 성적이 급상승했다. 아이와 나는 흥분했다. 아이 엄마도 흥분했다. 노력하면 되는구나.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후로는 성적은 쉽사리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덕분인지 원하던 경찰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비록 명문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성실함으로 포기하지 않은 너. 경찰관으로서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수능 치기 두 달 전에 비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급히 들어온 여학생이다.
성적이 원체 좋았다. 내신 1등급인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말이 너무 없었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로 젓거나 하고 말을 해도 짤막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공부한 여학생이 내게 그동안 감사하였다고 인사 문자를 해 왔다. 합격 소식과 함께.
너무 말이 없어 내 수업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학생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감사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촉촉해졌다. 이처럼 학생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미안하게도 하고 당황시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