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당대 이스라엘에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대적 관계였으나 예수님을 공격하는 데는 한마음이 되어 오월동주하는 사이가 되었다. (앞장을 참고하세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권위만 누리면서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다. 이는 그 뒤에 말씀에 나타난다.
즉 그들은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가르치며 백성들만 구속하고 자유를 제한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행함이 없었던 것이다. (4절) 우리교회 목사님은 오늘날에도 유대 율법주의 자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고 누군가가 눌러주기를 기다렸다가 타고 간다는 예를 드셨다. (여기까지 오늘 목사님 설교 일부입니다.)
나는 위의 목사님이 든 유대인들의 사례를 접하며 엘리베이터는 못타면서 밥은 먹고 화장실은 가겠구나 ..그렇다면 밥도 안먹고 그 자리서 꼼짝을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율법의 잔재는 오늘날의 교회에도 가끔 만난다. 오래전 주일에 점심을 밖에서 사 먹고 마트에서 장을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주일에 교회에서 밥을 먹지 않고 밖에서 사 먹는 일이 옳지 않고 또 마트에서 장을 보며 돈을 소비하는 일도 옳지 않다는 말을 하였다. 물론 주일에 예배 위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나 주일에 교회내 생활만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해서 왠지 자유를 구속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사람은 자꾸 뭣을 만들어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죄성에 근본 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시 유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남에게 보이려고 경문 띠(성경 말씀을 기록한 종이를 감은 것)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건함을 과장하여 보여주었다. 위선의 극치다.
세상에서 겸손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하고 또 자신의 특장점을 내세워야 뭔가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서민은 한 조각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 더 이상 낮아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스스로를 말할 때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만 안하면 된다.
스스로 낮아지는 것은 진정 높은 위치나 명예에 있을 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모세의 자리에 있었다.
충분히 존경받았고 그들은 권위를 가졌다. 그런데도 탐욕을 부리고 백성들의 짐을 나누어 지기보다는 더 강력한 율법의 조항으로 사람들을 구속했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 대중들을 더 쉽게 통제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진정 솔직하고 겸손하게 대중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은 이 사회의 지배층이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다만 대중들은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따라주는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행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