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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

by 미셸 오

예전부터 수업 후 왠지 허전할 때면 연필로 낙서를 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내가 그리는 것은 거의 낙서고 낙서할 때는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


간혹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잠을 이루지 못할 때는 헌 옷을 꺼내 새로 옷을 만들거나 리폼을 한다. 그러나 밤새도록 내 손에서 만들어진 옷은 거의 걸레 수준이 된다. 그러나 모든 신경을 바느질에 집중하는 효과는 의외로 커서 잠시 근심을 잊게 한 것만으로 만족한다.


일주일 전 어느 날에도 수업을 마친 후 낙서를 하였다.

수업 듣는 학생들 중에서 너무 이성적이고 예의 바르다고 해야 하나.... 늘 물 좀 마셔도 될까요. 화장실에 가도 될까요 하고 먼저 내게 물어보는 여학생이 있다. 게다가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인데 좀 근원적인 질문을 많이 한다. 다른 학생들은 그저 수월하게 넘기는 것도 본인은 이해될 때까지 붙든다. 나 역시 근원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공부가 잘 되지 않은 스타일이지만 가르칠 때는 좀 다르다.

근원적으로 파고들게 되면 학교에서 점수를 올리는 수업이 되지 못하고 학문하는 느낌이 들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또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날은 친구들과 꽃놀이를 하고 왔다는 여학생의 활짝 웃는 얼굴이 너무 빛났다. 오랜만에 편한

옷을 벗고 예쁘게 잘 차려입은 데다가 옅은 화장까지.


"사진을 찍어 줄게"


그렇게 해서 내 휴대폰에 그 여학생의 사진이 담겼다.

공부하느라 힘들긴 하지만 미래의 부푼 기대와 꿈을 가슴에 품은 그 나이 또래가 가진 에너지였다.

나중에 세상에 나가 기대와는 다른 세상에 마주칠 지라도 이 순간은 저 봄날에 환하게 부풀어 오른 벚꽃의

계절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업이 마쳐진 후 내 젊은 날을 회상하며 연필로 그 여학생의 얼굴을 그렸던 것이다.

오랜만에 잡은 연필이라 쉽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그 그린 그림을 수업 시간에 여학생 본인에게 주었다.

감사하게 받는다.


그런데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건네는 순간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여학생이 강원도 감자를 파는 데 광고 그림을 그려 응모했고 감자 한 박스를 받게 되었다는 그 일.

순간 아이코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더 그림을 잘 그리는 여학생에게 번데기 주름을 잡은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학생이 그려서 합격한 그림



" 아.. 너 그림 잘 그리는 줄 깜빡했다. 그냥 그 그림 돌려주라."


나의 번데기 흉내 그림을 빨리 되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여학생은 도리질을 하며 돌려주지 않는다.


"너 그림 잘 그리지? 빨리 감자 그림 말고 다른 그림 보여줘 봐."


그렇게 해서 나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여학생의 그림을 여러 장 보게 되었다.

공부도 잘하는 아이가 어떻게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는 것이지? 자기는 절대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수준급이라 여겨졌다.

이렇게 보면 신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미술대학도 생각해 보았다는 아이. 그리고 싶을 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려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리는 것이 힘들 것 같아 그림을 접었단다.

이제 여고 2학년에 갓 오른 여고생의 야무진 대답이 아닌가.


여학생이 그린 그림 1


나는 저 나이에 저런 생각을 뚜렷하게 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 역시 미술대학으로 갈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때 내 머릿속에는

명문대에 갈 생각만 하였지 내가 진정하고자 하는 꿈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이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얼마 전에는 코로나로 인해 수고하는 대구 의사회에 햇반을 보내고 친구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이. 이번에는 강원도 감자 판매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학생.

수업에 늘 성실하게 임해서 선생님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학생.

여학생이 그린 그림 2

어제는,

자신이 받은 감자 중 일부를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왔다.


"싹 난 것을 선물로 해도 될까?"


라고 염려하던 엄마의 말까지 전하며 내 앞에 내려놓은 감자는 어른 손 주먹 만한 것으로 열개가 넘었다.

물론 싹이 여기저기 조금씩 보였다. 강원도 감자가 지금 햇감자 출하시기와 맞물려 다 썩게 생겼기에

판매를 서두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본 바로는 창고에 쌓인 감자들을 싹이 안 난 것들을 선별해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강원도 감자는 맛있게 쪄서 먹었다.


늘 새로운 세대를 마주하며 사는 내가

미디어를 실시간 접하며 사회에 적극 동참하고 또 미래의 꿈을 펼치기 위해 졸음과 싸워가며 공부에 매진하는

여고생의 빛나는 얼굴을 대할 때 앞으로의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여학생이 그린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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