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가 낯설게 느껴지던 그 해. 교회에 첫 발을 디뎠다.
삶에 부대끼던 시간 속으로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온갖 세상의 지식으로 담을 쌓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난 붉은 화로의 한점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은 그런 존재다. 아무것도 아닌 것.
나는 기댈 곳이 없었기에 나를 도와줄 완벽한 신이 나타나 준 것이 한없이 기쁘고 좋았다.
이제 인생의 새로운 문,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난 진주로 된 문을 들어서기만 하면 이제까지의 삶의 고뇌가 당장 사라질 것 같은. 갈대처럼 한없이 흔들릴 때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는 신이 있다는 사실은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교회 다니세요. 예수께서 당신을 대신해서 죽으셨답니다. 천국 가세요.
라고 나를 붙들었던 기존의 기독교인들과 다르지 않은 나의 모습이 되어갔다.
그렇게 뜨거웠던 시간을 지내면서 언젠가부터
가슴은 식어가고 있었다.
피로 값 주고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상처들. 교만. 그리고 자기자랑.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를 떠날 수는 없었다.
교회는 그래도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따스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공기 속에서 바람 속에서, 빛나는 햇살 속에서, 푸른 바닷물빛 속에서, 새들의 날갯짓, 토끼들이 당근을 먹을 때의 입술의 오물거림, 말이 달릴 때의 말 갈퀴. 파도소리. 새벽의 미명 속에서 존재하시며
신의 뜻은 그런 것들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화가의 그림 속에서 화가의 의도를 , 소설에서는 작가의 문체를, 수필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제발 나타나 보여주시오.
그런 심정으로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그렇게 해서 유명한 무진기행의 작가처럼 영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고 또 부활하셨다는 믿음
그 믿음을 얻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의 죄를 대신한 신의 죽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조차 남은 옷 한 벌을 다 내어주셨다.
살아계실 때는 손가락질받는 자들의 곁에 가셨다.
당신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고
가난한 달동네, 창녀들, 홀로 외로운 사람들 곁에 가셨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아직 교회는 따뜻하다.
잠언 14장 21절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