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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호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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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Apr 09. 2016

#교회 공동체


예전에 우리 교회에 정신병인지 귀신이 들렸는지 알 수 없는 한 여인이 있었다.

정상이었다면 아름다운 중년을 보내었을 그녀는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갑자기 나타 고함을 지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마주하면 꾸짖기 일쑤였다. 가끔씩 차도의 중앙선을 따라 맨발을 하고 샌들을 손에 든 체  한 걸음씩 걷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해변의 모래 밟듯이.

시청으로 찾아가 행정을 잘 하라고 꾸짖기. 달려드는 버스를 가로막고 승차하기. 이브날 산타옷을 입고 마트 물건을 자루에 퍼담기 등등ᆞ

가끔 정의의 사도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감히 나서기를 꺼려하는 부당한 일이면 주저 없이 달려들어 욕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거의 그녀가 귀신 들린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영성이 깊은 목사님이 계시다면 기도로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고. 또 한쪽에서는 정신병원에 왜 입원을 시키지 않는 것인가 하고 다들 의문을 품었다.

그녀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서

매일 교회 본당 앞쪽에 이상한 물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항아리. 하루는 멍석. 이런 식이다. 그리고 얼마나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지.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었고 결국 교회서 쫓겨났다. 때는

적어도 목사님 정도의 영성이라면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능력을 행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가게  하거나 기도로든 말씀으로든 고통받는 그녀에게 도움  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바울 시대의 성령의 능력이 오늘날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

고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자가 많이 양산되는 시대는 타락한 시대'라고 한 설교가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걷는 목회자들을 보면 감히 신학을 하겠다고 달려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목회자들의 삶의 형편이 너무 편하고 좋아 보여서 신학을 쉽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주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신학을 그저 신학으로만 접하는 지식인.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지하교회서 예배를 드릴 때 성경책을 필사해가며 한 장 한 장 소리 죽여 읽고 찬송가도 속삭이며 하는 그런 분들에게 남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좋은 시설에 가까운 교회. 얼마든지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인가 불만에 가득 차 있다. 왜일까? 이미 많이 가졌는데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탐심이 아닐까.

성도의 예배조차 꺼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너무 복에 겨운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성도들만 탓할 수도 없다. 목마른 성도들에게는 소명의식을 가진 주의 종들이 간절하기 때문인 것을. 말씀을 잘 먹여주는 성령을 따라 사는 목회자들이 흔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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