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없었던 남항대교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리는데 저 멀리 바다에 태종대서만 보이던 주전자
바위가 보였다.
리브가는 부*여고 출신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영도에 자주 왔었다고 말해준다.
해서 서로 추억을 소환하느라 바빴다.
남항동을 지나 영선로를 따라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1년 넘게 살았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뺑뺑 돌아도 그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영선국민학교 담벼락 아래 열 지어 있던 이층 양옥집 끝이었는데 말이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남항동으로 접어들자 갑자기 익숙한 도로가 펼쳐졌다. 분명 내가 걷던 길이었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뭔가 탁 치받고 올라왔다. 그 길을 오갔던 나와 엄마와 동생.. 여러 장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펼쳐졌던 것이다.
" 바로 여기야! 내가 걸어 다니던 길!"
나는 탄성을 질렀다.
길 양옆의 건물들이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 길에서 쭉 올라가서 왼쪽으로 틀면 우리가 사는 집이 나왔어"
" 그래? 그럼 이 길로 다시 올라가 보자"
그래서 다시 큰 도로를 가로질러 산윗길로 올라가 본 길.
그 위치엔 역시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다. 영선국민학교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영선국민학교와 내가 살던 집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임을 인터넷에서 확인)
우리는 뱅뱅 돌다가... 그 아파트 자리가 우리가 살던 집일 거라고 추정하며 신선로를 따라함지골로 들어서서 달렸다.
오른쪽은 망망대해. 왼쪽은 산.... 그대로다.
중 3 때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길이었다.
남고로 도착하기 전 예전 그대로의 바닷가를 보았다.
리브가는 남고에 다니던 오빠가 살던 하숙집이라면서 바닷가 바로 위 저 멀리 허름해진
집들의 하나를 가리켰다. 초등학교 5학년, 오빠의 교복을 빨기 위해 이 바닷가에 와서 옷을 빨았다고.
그런데 비누칠을 할 때마다 비누가 옷에 척척 달라붙기만 하고 빨래가 영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아주머니들을 생각하면서 신나게 오빠의 바지를 빨았는데 말이지..
이튿날 그녀의 오빠는 옷이 왜 이렇게 뻣뻣하냐고 그랬단다. 얼마나 웃기는지.
"빨래터 아줌마들처럼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바닷물을 보니 얼마나 신나던지.. 물이 그렇게나 많으니.."
리브가의 말이다.
나는 씩씩하게 오빠의 교복을 문지르는 초등학생 리브가를 상상한다.
귀엽다!
우리는 예전에 내가 다니던 여학교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탔다.
영도여고를 지나 드디어 영도여중에 도착. 학교 이름이 태종대 중학교로 바뀌었고 학교 위로도 아파트가 즐비했다. 학교 이름만 바뀌었는데도 왠지 씁쓸하다.
대문을 들어서니 학교건물과 운동장을 그대로인데 운동장 앞에는 처음 보는 나무들이
흡사 밀림 속의 나무들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물론 그 무성한 나무들로 인해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늘 앉아서 바다를 조망하던 벤치와 가방을 들고 오르내리던 길도 그대로인데 어느새
여중생 키 만하던 나무들이 몇십 년간 무섭도록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 나무들의 성장을 보면서 '아. 세월이 참 많이 흘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뿐인가 하얀 돌바위들이 가득했던 산 꼭대기는 나무들이 자라서 초록색으로 덮여 있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그 산정상까지도 사람들이 사는 집들로 다 덮일 것만 같다.
이 여학교는 그 당시 이 동네서 가장 꼭대기 학교여서 공기가 정말 좋았다.
그때는 산 이름을 다들 고갈산이라고 했고 이름에 맞게 산엔 온통 돌밖에 보이지 않았다.
학교도 신축이어서 깨끗했고 교실에서 바라보는 저 멀리 바다는 물결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거렸다.
하지만 등굣길은 정말 산악등반 수준이어서 여학생들의 종아리는 일 년도 안 돼 알이 박혔다고 한다.
특히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풍선처럼 부풀며 위로 올라가는 치맛귀를 부여잡고 우산과 가방을 들고
등반하는 여중생들은 그야말로 비로 흠뻑 젖었다.
산 맨 아래 바다 옆이 버스 종점이었고 그 종점 앞이 남고. 좀 비탈길을 오르면 영도여고... 그리고 우리 학교가 맨 위였다. 이럴 수가.. 거꾸로 지어진 학교들이 아닌가? 남학교가 맨 꼭대기였어야 했는데 말이지.
하교 후 정거장에 가면 까만 교복들이 가득 차서 여중생들은 늘 끄트머리에 줄을 서야만 했다.
여고생들은 머리를 양갈래로 땋았고 허리가 잘록한 상의에 플레어 검정 치마를 입었다.
우리는 세일러복에 주름치마 그리고 단발. 남고생은 정말 일제강점기 까만 남학생 교복 그 자체였다.
그 비좁아 터지는 버스에 오르면 영도의 해안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버스가 이리저리 쏠리면 학생들의 고함소리가 버스 안에 가득 찼다.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의 몸이 서로 끼여서 누구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이 빽빽하게 학생들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했다. 차장들은 자신들의 두 손과 몸을 이용해 버스 안으로 학생들을 힘껏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나는 자연 속에 있어야 할 야생초 같은 소녀였기에 함지골 자연 속 여중생 시절은 꽤 만족스러웠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은 갓 사범대를 졸업한 신참 선생님들이 거의 80프로였고 또 자주 바뀌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3년 내내 같은 선생님에게 배웠던 사립고등학교의 늙고 노련하며 정체된 선생님들에 비해
자주 바뀌는 젊은 선생님들이 훨씬 내게 맞았다.
그들은 열정이 있었고 또 순수했고 서툴렀다. 온 지 얼마 안 된 선생님도 어느 날 발령이 다른 데로 나서 떠나거나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다른 선생님들과 대체되고 하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매일 운동장에 서서 듣던 교장선생님의 훈화였다.
발이 시리던 추운 겨울이건 땡볕이 내리쬐던 한여름이건 운동장 조례는 엄격했고 오래 서 있다가 픽픽쓰러져서 선생님에게 안겨 양호실로 가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땐 선생님들이 너비가 있는 회초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학생들의 군기를 세게 잡았다. 특히 조례 시간에는 회초리로 아이들의 등짝을 갈기는 경우도 있어서 조례 때는 이래저래 스트레스였다.
당시는 왜 그렇게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많이 때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학생이 잘못해서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택도 없이 손찌검을 가하는 선생들도 있었다.
자기 분노에 못 이겨서.
우리는 하교 시간에 산길을 내려오면 길가에 즐비한 분식집을 절대 거르지 않았다.
군만두며 쫄면이며 라면을 파는 집들은 남고생들과 여학생들로 꽉 들어찼고 그때의 라면은.. 쫄면은.. 왜 그렇게 맛있었나. 게다가 여고 앞까지 줄 선 문구점 안에서 파는 설탕 뿌린 도넛이며 크로켓이며..
만화방도 많아서 아이들의 가방에 만화책들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얼마나 만화책이 유행이었나 하면 한 번은 학교에서 전교생들의 가방을 급습. 만화책을 몰수한 적도 있었다.
<베르사유 장미> <캔디> 같은 만화는 다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마음을 훔쳤던 대표적인 만화이고지금도
나는 그 만화들보다 재밌는 것이 없다고 여길 정도다.
이번에 학교와 주변을 돌아보면서 예전에 없었던 길을 타고 내려왔다.
그 옛날의 넓었던 길들은 골목처럼 작아졌고 아파트 군락 사이로 이리저리 길이
나 있어서학교를 오르내리던 길은 무척 짧아진 것처럼 보였다.
인간들이 지은 것들은 하나 둘 쇠락해 가도 여전히 변함없던 것은 먼바다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을 그 바다.
리브가와 차를 돌려 함지골을 돌아 나오면서 그때 그 시절의 팝송 스콜피언스의 '스틸러빙유'를 들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