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편백나무 숲길의 말없는 위로

by 미셸 오


편백나무 숲길로 가는 길. 차창밖으로 빗물이 비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빗물로 흐려진 창밖으로 지나치는 산과 바다. 그리고 나무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사물을 흐릿하게 버무린 추상화처럼.

raindrop-6544618_1280.jpg 픽사베이

이런 분위기에서는 가이드의 안내보다는 짙은 감성의 노래를 틀어주면 좋을 텐데.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체력의 한계를 실감한 나는 좀 서글퍼져 있었다.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갑자기 훅~하고 시간이 날아가고 생기를 잃어가는 나뭇잎처럼 내 푸른 육신이 노랗게 변해가는 느낌이랄까.


작년에 호주에 갔을 때 12시간 차로 이동 후 어지럼증을 느끼고 호텔에 저녁도 못 먹고 누워있을 때 동생이 "누나ᆢ 왜 이렇게 허약해 졌어?"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었다.

젊었을 때는 내 눈. 내 다리. 내 귀가 다 건강했고 여행 가방에는 약봉지가 하나도 없었는데. 갱년기라는 통과의례는 너무 가혹한 인생채찍이었다.

이젠 고혈압약. 진통제. 파스 등등 챙겨야 할 약봉지가 많아졌다.

좀전에 올랐던 계단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그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니 마음까지 흔들렸다.

puddle-2584378_1280.jpg 픽사베이


지금 이 순간 Roy Ciark 의 ' Yesterday, When I was young '을 듣고 싶다. 삶의 깊이가 담긴 낮게 긁는 가수의 음질은 노년에 청춘을 회고하는 자로서의 성찰이 아주 깊게깊게 느껴진다.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땐 삶은 달콤했다. 혀위에 떨어지는 비처럼..삶을 우습게 봤다....밤의 가벼운 바람이 촛불을 놀리는 것처럼....내가 꿈꿨던 수천가지 꿈들..내가 계획했던 장황한 것들 난 항상 그것을 약하고 움직이는 모래위에 세워올렸다. 난 밤에 살았고 낮의 헐벗은 빛을 피해다녔다. 그리고 지금 난 오직 세월이 어떻게 달아나는지만 보인다..'

편백나무들

그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는 가랑비로 바뀌었다. 우리가 걷는 길 왼쪽에 히노키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오른편엔 계곡물이 흘렀다. 비가 내린 탓인지 물살이 세다. 물은 깨끗하고 맑다.

편백나무의 숨결을 일부러 후~하면서 들이마셨다.

나무의 숨결덕분인지 후들거리던 다리 떨림이 멈추었고 마음도 진정이 되었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축축한 물냄새 탓일까. 나무 향이 강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편백나무(히노키)는 향이 부드럽고 내구성이 좋아 욕조외 고급 건축재에 많이 쓰인다.

숲길 오른쪽에 흘러가던 계곡물

반면 스기는 히노키보다 저렴하지만 습기에 약하다 . 언뜻 지나치며 볼 때는 스기나 히노키나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나무의 단면을 자르면 스기는 붉고 히노키는 노란빛이 난다고.

곧게 뻗은 일자형 편백나무 사이사이로 공간분할이 이루어져 차로 이동할 때나 걸을 때나 바라보기만 해도 멋지다.

우리 넷은 히노키 나무를 등지고 사진을 찍었다. 이 길이 끝나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버스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무대 위의 연극처럼 한 막이 끝나면 다른 막이 올라가는 것처럼. 그냥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 좋겠다. 이왕이면.

예전엔 오만과 자만으로 가득했던 삶이었을 지라도. 언제까지나 나만은 늙지 않을 것이라는 마법에 걸려 삶을 낭비하고 그 허무함을 깨닫지 못하였을 지라도. 나와 같은 무대에 섰던 친구들이. 가족들이. 내 곁을 떠났을 지라도. 나에게 아직도 부를 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