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먼저 만나라

이엘 프랑켈 <엘리베이터>

by 미셸 오

"따분한 오후였어

나는 심심해서 뒹굴뒹굴하다가

로코(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어

우리 집이 있는 4층에서 엘리비에터를 타고

1층 단추를 꾹.


앗, 올라가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나타나는 6줄의 짧은 글. 이상하게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치솟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첫 장의 여백이 주는 느낌은 뭐랄까. 집에서 무력하게 지내다가 주인공처럼 같이 산책을 나서는 기분이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기면 뜻밖의 한 장의 흑백 그림이 글자 하나 없이 두둥실 나타난다. 주인공이 개 한 마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그림이. 아하... 이거 만화인가 보네.. 그림동화인가?.. 그런데 뭔가 그림이 좀 색다르다. 심오한 주제가 나타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마구 뒤섞인다. 일단 글자가 없으니 독자인 나는 오롯이 그림에 몰입된다.

책장 한 면에 가득 차게 그려진 길쭉한 그림을 보면 꼭 엘리베이터 안에 나도 덩달아 같이 탄 느낌을 갖게 된다. 아하ᆢ이것이구나. 독자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 그래서 나도 엘리베이터 안에 같이 선다.

그런데

1층 버튼을 누르기 전 7층 버튼을 먼저 누른 누군가로 인해 우린 7층에 도착하고 개를 무서워하는 폴라 아주머니를 만난다.

폴라 아주머니가 또 1층을 꾹.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8층으로 올라간다. 이게 뭐야? 작가가 의도적으로 밑밥을 까는 거야 뭐야 이런 식상한 생각이 순간 스치지만 계속 책장을 넘기고.

아파트에서 가장 나이 많은 미겔 할아버지가 탄다..

또 폴라 아주머니가 1층을 꾹.


이상하게도 엘리베이터가 왜 이래? 하고 말을 하거나 불만을 토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죠? 하고 헛웃음을 날릴 판인데도 말이다.

이번엔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추고 쌍둥이를 태운 유모차와 코라 아주머니가 탄다... 그리하여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파트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고 엘리베이터는 3층과 4층 사이에서 멈추어 버린다.


이 정도쯤에서 나는 불안해하거나 화가 날 듯도 하다. 그런데 아무도 말이 없네? 나도 입을 꾹 다문다.


잠시 후 아기들은 울기 시작하고 배가 고파서 우는 것인 줄 안 코라 아줌마가 케이크를 꺼내 한 조각씩 나눈다. 친구집에 케이크를 갖다 주러 가던 길인데 뭐 어떻냐고 아무나 맛있게 먹음 된다고 ᆢ

나도 한 조각받았다. 이거 좀 괜찮은데 싶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서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니. 색다른 경험이지 뭐겠는가.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또 쌍둥이들이 잠투정을 하자 미겔 할아버지가 '아무렴 어때?'라는.

속마음과 반대로 이야기하는 곰이야기를 들려준다. 곰은 생일파티에 아무도 오지 않아 쓸쓸했지만 "아무렴 어때"라고 말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늦게 도착한 친구가 케이크를 혼자 다 먹어버린다. 그래도 곰은 "아무렴 어때 " 라며 화를 내지 않고 케이크 없이 소원을 빈다.


나는 이 곰이야기의 "아무렴 어때"가 이 책의 주제를 압축한 것 같았다. 나 역시도 처음엔 엘리베이터가 낡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짜증이 나려던 참인데 케이크를 먹으면서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곰이야기의 곰이 케이크 없이도 소원을 빈 것처럼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도

케이크 상자 속의 초를 켜고

소원을 빌고는 후~~


바로 그 순간. 아무도 단추를 누르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췄다.

끼익~~ 소리와 동시에.


아마도 다들 엘리베이터가 다시 작동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던가 보다. 나도 그랬는데..훗.


이때 4층에 사는 주인공이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에게 자기네 집에서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하고 다들 환영한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든 말든 아무렴 어때? 이렇게 좋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 걸"

미겔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래서 이야기는 마친다. 그리고 책장의 마지막에 이런 글이 적혔다.

"여행은 우리를 달라지게 해. 엘리베이터 속 짧은 여행조차도 말이야."


그렇다. 이 엉터리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서 짜증 내고. 사람을 부르며 불안해 하기는 커녕 서로 달래고 나누고 하다 참고 하다 보니 다들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간명한 흑백의 그림과 짧은 글로 된 이 얇은 책 한 권이 책장을 덮은 후에도 묘하게 기억에 남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씩 마주치는 이웃들은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다를 게 전혀 없다. 탈때와 내릴 때 인사말 정도 하면 그걸로 끝이다.

나도 여기 이사 온 지 8년 차이지만 나와 활동하는 시간대가 비슷한 이웃이 아니면 만날 일이 전혀 없다.

어쩌다가 내가 잘 안 나가는 시간대에 엘리베이터를 타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들이 수두룩하다.


만일 책의 내용처럼 엘리베이터 안에 잠깐동안이나마 같이 지내면 서로 낯선 이웃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사건을 통해 뜻밖의 이웃의 정을 느끼게 만들어 버린 책!

엘리베이터 안의 갑갑함. 혹시라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어떡하지 하던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살던 나에게 엘리베이터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다소나마 해소하게 해 준 책이다.


책의 편집과 그림도 마치 독자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작가의 능력이고 의도이리라.


혼자 살아야 편하다고 아우성치는 현대에 사람과 서로 연대하고 어울리는 맛을 깨닫게 해주기도 하지만

막연한 불안감. 분노. 짜증스러운 일상을 어떻게 마주하는 것이 좋은지 작가는 말한다.


"아무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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