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사람이 땅위에 번성~~' 의 말씀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이전에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축복의 완성일까? 2절의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개혁주의적 신앙관점에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믿음의 후손)로 경건하게 살던 자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둘째는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으므로 남자를 지칭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며 여자는 남자(사람)로부터 나왔기에 사람의 딸로 해석한다.
남자가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모든 여자들을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한 남편이 한 아내를 맞이하여 한 몸이 되라고 한 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약속이고 가정의 질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창조를 흔들어 버렸다.
이것은 창세기 3장 6절에서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취한 하와의 패턴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한 사람의 범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참고
요한1서 2장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온 곳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래서 죄는 이렇듯 정형화되어 계속 반복되어 왔으면 지금도 진행 중이다.
4절에 보면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가 나타난다. 네피림은 히브리어로 말하면 ‘나팔’이라는 단어인데 ‘ 폭력과 힘, 권력으로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자들 ’로 해석될 수 있다. 또 거인(권력자) 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용사 역시 힘으로 굴복시키는 자이며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다. 즉 이름을 가진 자들이 네피림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자들을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성공적 삶은
하나님의 사귐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쫓아 취한다고 해서 샬롬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에 있을 때 진정한 샬롬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지도할 때도 우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우리의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하고 기도가 되어야 한다.
자기 힘으로 지배하고 군림하여 이름을 내는 이들은 6절에 하나님이 땅위에 사람지으신 것을 한탄하고 근심하게 되신 이유가 된다.
3절에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이 머물 수 없는 사람인 육신( 고깃덩이-히브리어 번역)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인격이 아니고 고깃덩어리란 말이다.
11-12절에 가면 그런 육신된 인간은 결국 부패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는데 이때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마음은 분노와 징계가 아니었다.(8절)
8절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원어로 분석하면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다’는 뜻이다. 은혜란 내가 원하는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내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질서가 무너진 이 땅 가운데서 행하실 것이 없어 떠나버리고 인간이 고깃덩어리로 나뒹구는 모습을 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다. 그래서 처음 창조하신 샬롬을 어떻게 다시 누리게 할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노아는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9절에 나온다. 그것을 보았기에 노아는 세상이 가는 곳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서 갈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지혜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시대를 볼 때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이 있는 곳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라고. 그리고 그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라고 간구해야 한다.
9절은 노아가 그렇게 살았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자신의 삶에 가장 소중했던 부분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지만 노아도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은 아니다. 800세를 살았던 노아가 500세에 셈을 얻었으므로 늦게 시작한 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늦은 때란 없다.
그는 인생의 나머지 시간을 방주 만드는데 몰입했다. 비를 몰랐던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참고 - 120년에 대한 학설
첫째, 홍수이후 지구의 환경이 변화되어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 되었다는 설이다.
홍수 이후 이전과 달라진 생태계에서 800년의 삶이 과연 복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에 이 땅의 120년이 오히려 복이 된다.
둘째는 노아가 방주를 짓고 홍수가 나는 기간까지를 120년으로 본다.
노아의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은 세상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일이었으나 그는 자기 가족뿐 아니라 인류의 새로운 시간을 허락하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이처럼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는 가치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내가 주의 일을 할 때 그 안에서 나외에 가족과 공동체가 살롬을 누리게 된다. 나만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그의 샬롬안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노아처럼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하고 그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에 전적으로 우리를 내놓을 수 있는 자가 되자. 노아도 심판은 확정되었지만 그때가 언제인 줄 모른채 방주를 만들었듯이 오늘날도 그때는 모르지만 심판은 이미 선포되었고 확정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지금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노아의 때와 같은 동일한 패턴 안에서 살아가는 중임을 잊지말자.
그러므로 노아처럼 남아 있는 생애를 하나님의 눈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