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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Dec 25. 2015

#예측 불가능한 삶

 몇 년 전만 해도

여기서 P시까지는 차로, 그것이 버스든 승용차든 2시간이 꼬박 걸렸다. P시까지 가는 동안 세 개의 읍을 거쳐 M시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행버스는 읍을 거칠 때마다 십 분 이상 지체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때는 자가용을 타고 한 번에 쭉쭉 달려가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시간도 적게 소모되었다.

그러나 시간의 누적 속에서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고속도로가 생기고 바다 위로 다리가 놓이면서 이제  1시간 10분이면 P시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처럼 낡은 완행버스에서 나던 기름 냄새와 눅눅한 가죽시트 냄새도 없다. 버스도 그동안 커졌고 깨끗해졌다. 운이 좋으면 넓고 편안한 우등버스를 탈 수도 있다. 그래서 직접 운전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편하게 도시를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또 터널이, 도로가, 다리가 생기면 P시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 날도 버스를 타기로 하였던 것이다.

 P시에서 오전 11시에 모임이 있었다. 적어도 10시 30분까지는 도착하여야 했으므로 8시에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터미널에서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버스표 판매 창구 아가씨가

"오늘 8시 35분 버스가 회사의 사정으로 갑자기 취소되었습니다. "

라고 하지 않는가. 직통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오전의 일정을 미리 계산해서 움직인 것이라 이 버스를 놓치면 모임에 늦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9시 5분 차를 타려면 터미널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야 하나.

 

바깥에는 아침부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동행한 딸은 생리통으로 얼굴이 붓고 몸이  편치 않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모임에 참석자로 명단을 올려놨고 G읍에 사는 후배와도 P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약속을 깨면  안 될 터였다.

잠시 후 우리는 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보다 늦게 자신의 차로 출발하려던 후배에게 전화를 건 뒤 P시 직통버스가 아닌  G읍행 버스에 올랐다.

몇 개의 읍을 거쳐 M시가 목적지인 시외버스는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두 분 그리고 우리.  총 다섯의 손님을 태우고 출발했다.

버스 안에는 살짝 난방을 해서인지 습기도 없고 선선했다. 또 완행버스 특유의 묵은 기름 냄새가 없어 다행이었다.

어떤 사람은 차에서 나는 석유냄새가 좋다던데 그 냄새를 맡기만 해도 나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

오래전에 대도시로 향하던 모든 차들이 거쳐갔던 도로는 이제 한산하기만 하다. 큰 도시로 향하는 차들은 모두 빠른 고속도로를 택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가 탄 버스는 시원하게 국도를 달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렇던 들판이 검은 땅이 되어있다.


"엄마 저기 밭에 있는 거 있지? 마시멜로 같은 거"


딸은 벼를 다 베어낸 벌판 곳곳에 놓여있는 드럼통 같은 하얀 스티로폼을 가리켰다.


"저거 거름 넣는 데잖아. 근데 누가 마시멜로라고 인터넷에 올려놓으니까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있더라."


"저거 거름통이었어?" 


과연 그것은 거대한 부드럽고 하얀 마시멜로 같아 보였다.

우리는 그 마시멜로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아직도 집보다 논밭이. 산이. 벌판이 많은 곳이다. 새삼 우리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아침, 뜻하지 않은 상황에 부딪히고 또 전혀 계획에도 없던 일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신기하다고나 할까. 30분 간격으로 배차시간이 정해진 직통버스가 펑크가 날 줄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비 오는 월요일 딸과 함께 뜻밖의 버스를 타고 시 외곽을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십오 분도 안되어 G읍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주변은 다 논밭이다. 터미널 옆 어딘가에 소가 싸놓은 쇠똥이 가득할 것만 같은.


"거름냄새가 나"


 이 읍에 처음 발을 딛는 딸이 말했다.

 싸늘한 터미널 객실을 빠져나올 때에는 어른  서너명과 학생 두엇이 난로 앞에 모여 있었다.

읍 시내로 걸어나왔다.  비는 이미 말짱하게 개었다.

후배와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제법 남았던 터라 이 낯선 거리를 좀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5분도 걷지 않아 사거리에 꽃집, 뚜레쥬르 빵집, 파머 마켓, 김밥천국, 농협은행, 한의원 등이 나타났다.

빵가게 창에 작은 등이 크리스마스가 가깝다고 반짝거렸다. 우리는  그곳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빵가게 마담은 그곳이 G읍의 중심가라고 말했다.

도시라면 사람들로 웅성대고 가게마다 반짝이는 점멸등이 켜지고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지겠지만 오직 이 빵가게 창에만 반짝이는 초록. 빨강의 등이 걸리고 작은 모조 트리에 뿔 달린 사슴 인형과 둥근 방울, 리본이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의외로 빵집은 컸다. 빵이 진열된 옆에는 제법 넓은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갖춰져 다.

둘이서 아메리카노 커피와 캐러멜 마키아또를 다 마실 무렵 후배가 빵집 앞으로 찾아왔다.


 

높은 다락같은 버스를 타고 시원하게 달려와 낯선 거리를 걷고 처음 본 읍의 빵가게서 커피를 마시는 행운.

그것도 내 사랑하는 딸과 팔짱을 낀 체 이른 아침의 찬 공기를 마시며 한적한 길을 산책하였다.

그 순간은.

비그친 하늘에서 햇살이 비추기도 하였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했던 검은 개.

그 개를 보며.

딸은 유치원 때 매우 친밀했던 강아지 깜돌이를 떠올리며  행복해했고 나는 허약했던 딸과 마음을 교류했던 그 깜돌이 강아지를 기억해냈다. 유치원 차에서 내린 아이가 집에 오지 않아 아파트 문을 나가보면 딸애는 아파트 입구 가게 주인이 기르던 개와 놀고 있었다.

유치원 가방을 옆에 두고 평상 위에 모로 누워 깜돌이의 눈높이를 맞춰주던 아이.

가슴이 찡한. 그 시절. 우리 아이와 정말 친했던 강아지 깜돌이.

유독 딸애에게만 꼬리를 흔들며 가까이가 몸을 비비던 그 검은 강아지가 성인이 된 아이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G읍을 빠져나 올 때 하나님이 갑자기 어떤 미션을 주었고 우린 그것을 잘 실행하였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저 그날의 일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 터미널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기로 했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주어진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신념대로 또 일정을 변경하고 움직인 덕분에, 일정을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덕분에,

비록 그날 P시에서의 일정을 다 소화하고 돌아온 후 몸살을 앓기는 했지만 ,

 그날 아침 우리 모녀에게 주어진 한 시간이 그 날 하루의 일정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갑자기 미리 계획한 일들꼬일 때  포기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 오히려 그 의도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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