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역삼동 사무실.
월요일 아침부터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연휴 시즌을 앞두고 최고의 매출 성과를 내기 위해 마케팅 부서는 온 전열을 다해 행사를 기획했다. 오늘은 대형 유통사 MD에게 보낼 '명절 매출 예상 보고서'의 1차 검토본을 인쇄해 퀵으로 보내는 것이 오전 첫 업무였다.
"허 주임, MD님 오늘 일정이 빠듯하시대! 이거 9시 30분 퀵 마감이야!
과장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사무실 복사기로 뛰어가 고급 용지에 인쇄된 두꺼운 보고서를 제본했다. 뜨끈한 보고서를 서둘러 퀵 기사님께 넘기고 나서야, 기한 안에 업무를 마쳤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오후의 중요한 일정을 위해 PT 자료를 검토해야 했다. 거래처와의 오후 3시 신제품 마케팅 PT를 위해 며칠 밤낮을 준비한 자료다.
오후 5시 거래처 근처.
'프리미엄 HMR 신제품' 마케팅 PT를 성공적으로 끝낸 나는 충정로역으로 들어섰다. 바로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 회사에 노트북을 가져다 놓고 홀가분하게 퇴근하려고 2호선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과장님의 전화가 걸려 왔다.
"허 주임. 지금 어디쯤이야? 나도 계약서 때문에 외근 중인데, 자네가 아침에 보낸 '명절 매출 예상 보고서' 말이야. 방금 유통사 MD에게서 전화가 왔어. 최종 검토해 보니 '경쟁사 신규 할인율'이 반영이 안 되어 있다고 하네. 6시까지 수정된 최종본을 인쇄해서 다시 퀵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어! 분명 자네가 나한테는 최종 DB에 반영했다고 보고하지 않았나?"
'아, 분명 최종안으로 수정한 것 같은데, 이전 파일을 출력했나?'
하늘이 노래지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MD가 요청한 6시까지 퀵 도착을 맞추려면 5시 50분까지 접수를 마쳐야 한다. 시계는 5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회사 도착시간 35분, 수정 후 인쇄·제본까지 5분. 매우 빠듯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는 노트북 가방을 크로스로 고쳐 매고,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노트북을 열어 최종 파일을 확인했다. 분명 '경쟁사 할인율 업데이트'가 반영이 되어있는데, 출력할 때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최종 검토를 소홀히 했다는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네, 과장님. 지금 확인해 보니, 파일은 확실히 최종본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력 오류나 반영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사무실 들어가서 해결하겠습니다."
그 순간, 플랫폼에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 몸을 지하철 안으로 던져 넣었다.
"네. 과장님, 지금 지하철 탔습니다. 최대한 일찍 도착해서...."
문이 닫히고, 안도감에 살짝 마음을 내려놓는데, 그때 열차의 방향이 눈에 들어왔다.
충정로에서 시청 쪽으로 향하는 내선을 타야 했는데, 반대쪽인 아현 방향을 탄 것이다. 분명 내려오면서 확인했는데, 지하철을 빨리 타야 한다는 압박감과 자책이 시야를 가렸다, '섬식 승강장'인 충정로역에서 좌우 방향감각을 잠시 잃고 눈앞의 열차만 보고 몸을 밀어 넣었다.
열차는 속도를 높였고,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순환선이라 반대로 가도 회사에 도착은 하겠지만, 최소 20분 이상 더 소요될 것이다. 도저히 마감 시간까지 퀵을 접수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머릿속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저... 과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해서... 지하철을 반대로 탔습니다. 지금 이대역입니다. 제가 지금 바로 양 대리님께 전화해서, 파일 보내고 퀵 접수를 부탁하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의 안을 제시했다.
"하... 알았다. 양 대리한테 전화해서 인쇄된 거 잘 체크해서 보내라고 해. 자네가 아까 최종 검토를 제대로 했더라면 다른 팀 양대리까지 동원될 필요가 없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내려서 빨리 반대편 지하철 타."
수화기 너머의 과장님은 실망감과 불안이 담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장님의 질책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혔다.
나는 이대역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문밖으로 뛰쳐나가 반대편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양 대리님께 전화해 양해를 구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통화를 끝난 이후에도 일 처리가 잘 되고 있을지 계속 초조했고, 결정적인 실수를 동료에게 수습하도록 떠넘긴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후 6시 10분 역삼동 사무실.
결국 회사에는 6시 10분이 넘어 복귀했고, 양 대리님은 이미 5시 50분에 퀵 접수를 간신히 마쳤다고 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테이블 위에 보고서의 타공 된 잔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양 대리님께 거듭 감사를 표하며 밥 한 번 사겠다고 약속했다. 내 손을 떠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는데, 과장님의 호출이 왔다.
"허 주임, 오늘 일에 대해 할 말 있나."
그냥 혼을 내시는 편이 나을 그런 질문이었다. 그 침묵과 압박감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검토를 다시 한번 했어야 하는데..."
"발송 전 서류 검토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자네의 단순한 실수 하나가 회사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신뢰가 생명인 MD와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마케팅 PT를 성공적으로 하면 뭘 하나, 디테일이 떨어지는데. 프로 의식의 부재가 이렇게 통제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거네. 이런 작은 실수 하나하나가 자네의 실력으로 평가된다는 걸 왜 모르나."
과장님의 싸늘하고 무게감 있는 훈계는 나를 더 자책하게 했다. 주임이라는 직급은 실수가 용납되기 어려운 자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최종 보고서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동료에게까지 수습을 떠넘긴 오늘의 실수는 분명 내 커리어의 결정적인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피로와 자책감이 뒤섞인 채, 사무실을 나온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지하철 벤치에 주저앉았다. 멍하니 플랫폼을 바라보며 몇 번의 지하철을 그냥 보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지하철에 탔지만 '프로 의식의 부재가 통제력을 상실하게 만든다'라는 과장님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닌, 주임이라는 직급의 무게와 책임감을 깨닫게 해 준 혹독한 통과 의례였다. 이 쓰라린 경험이 앞으로의 내 커리어에 본보기가 되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 될 것임을, 나는 흔들리는 지하철 창밖을 바라보며 뼈저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