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진짜 피곤하다. 회사 업무에 짓눌려 하루 종일 일하느라 녹초가 됐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30분, 오늘은 헬스장 가는 날인데, 운동할 힘이 1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헬스장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지만, 오늘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혹시 관장님이 입구에 나와 계실지도 모르니까!
내가 다니는 이 동네 헬스장은 시설은 좀 낡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로 유명하다. 특히 관장님은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이장님 스타일의 성격인데,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먼저 인사하기로 유명해 동네 어르신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명물이다.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헬스장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살갑게 챙겨주는 다정한 분이다.
근데 문제는 1년 전 내가 이 헬스장의 문을 두드렸을 때 관장님께 직접 특별 관리를 부탁했다는 거다.
"관장님, 제가 진짜 의지가 약하거든요. 제가 작년에 다른 헬스장에서도 3개월 동안 딱 5번 갔어요. 저는 돈만 기부하는 타입입니다."
"걱정 마세요. 저에게 오신 이상, 더이상 기부만 하시게 두지는 않겠습니다.
"안 나오면 바로 연락 주셔서 저 좀 집에서 끌어내주세요. 지독하게 관리 부탁드립니다."
내가 내 무덤을 팠다. 곧 관장님에게 카톡이 올 것 같았고 이 몸으로 운동 할 엄두는 안 나고.
그때, 문득 얄팍한 꾀가 떠올랐다.
일단 관장님의 밀착 관리를 피해야 했다. 관장님이 저녁식사 하러 가신 틈을 타 운동하러 간 것 처럼 속이면 될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에서 전에 헬스장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찾았다. 운동화와 쉐이커 보틀 사진을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와, 이거면 감쪽같겠는걸!'
SNS에 심혈을 기울여 고른 사진을 업로드하고 해시태그를 달았다.
오늘도 #오운완! 역시 하고 나니 개운하다! #헬창의삶 #운동중독
이걸 올리고 나니 죄책감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휴... 관장님한테 걸릴 일은 없겠지. 그렇게 사진을 올리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건지 깨보니 새벽 다섯시였다.
휴대폰을 충전하고 좀 더 자려다가 습관적으로 SNS를 확인하는데....
아뿔싸.
어제 올린 '오운완'게시물에 달린 관장님의 댓글 하나가 내 심장을 멎게 했다.
"회원님! (관장님은 나를 회원님이라고 절대 부르지 않는다.) 몇시에 체육관 나오셨어요? 제가 밤 10시까지 기다렸는데 뵙지 못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운동 하신건가요? 어디서든 득근!"
망했다. 이건 완전 공개 저격이었다. 친근함과 엄격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댓글의 뉘앙스. 나에게는 꼭 "나는 니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있다."라고 읽혔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다른 헬스장 지인들의 대댓글이 달린 것인데,
"나도 어제 허장군 못 본 거 같은데. 다른 헬스장 간거면 배신이야"
"어제 저녁 먹으러 나갔을 때 왔다 갔나봐요!"
"안 오고 온 것 처럼 뻥치는 거 아니야?"
"어, 이 사진 전에 올렸던 사진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머리가 띵했다.
이대로 굴욕적인 댓글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들어 헬스장으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5시 30분. 하... 아직도 헬스장 오픈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초초한 나는 헬스장 앞에 가서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하... 이 모든 상황은 내가 자초한 일이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괜히 일만 키운 꼴이 되었다. 관장님은 내가 나타나지 않자 연락을 하려고 하셨을테고, SNS에 거짓말로 운동을 간 것처럼 허세 넘치는 피드를 올리니 괴씸죄로 단죄를 택하신 듯 했다.
관장님을 기다리는 30분이 3일처럼 느껴졌다. 5시 50분이 되니 멀리서 관장님이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움 반, 엄근진 반이 섞인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어이쿠, 우리 회원님! 새벽 운동 나오셨어요? 어제도 오운완 하셨는데, 오늘은 쉬시지."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관장님의 단단한 팔을 붙잡고 속삭이듯 말했다.
"관장님... 죄송해요. 제가 어제 너무 피곤해서... 의지가 약했습니다. 저 왔으니까... 부탁인데, 그 댓글 좀 ....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요...."
관장님은 팔짱을 끼고 잠시 나를 쳐다보셨다.
"댓글? 왜 지워요? 회원님 정신 차리시라고 달아드린 애정표현인데 왜요?"
"아... 관장님... "
나는 최대한 애교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니, 좀 누그러지신 관장님은 다시 평소 나를 부르는 닉네임으로 부르며 당부하셨다.
"허장군이 나한테 부탁했잖아. 지독하게 관리해달라며. 난 그대로 한 것 뿐이야."
"아, 그럼요, 그럼요. 딱 한 번 만! 부탁드릴게요. 이제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나는 애걸했다.
"좋아 그럼, 3대 중량치기 5세트 하고, 오운완 인증하면 댓글 지워주지. 고고"
나는 결국, 그날 새벽부터 아무도 없는 텅 빈 헬스장에서 벌칙같은 근력운동을 빡세게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 창피한 상황을 끝내야 했기에 도망갈 수도 없었다.
모든 운동을 마친 후, 관장님은 만족스럽게 내 셀카를 찍어주셨다.
"이게 진짜 '오운완'이다. 다음부터는 진짜 운동하고 올리는 거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
관장님은 약속대로 댓글을 지워주셨고, 다행히 민망한 가십 상황은 더 불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나는 SNS 운동피드에 관장님의 댓글이 달릴까봐 조마조마 했다. 덕분에 가짜 '오운완'은 내 피드에서 사라졌다. 굴욕적인 사건이었지만 덕분에 내 운동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다시는 관장님의 실시간 댓글을 보고 헬스장에 뛰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