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전 11시.
나른하게 늦잠에서 깬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 근처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쇼핑몰 바닥의 대리석은 아침 햇살을 받아 깨끗하게 빛났고, 몰산책을 즐기는 견주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아침 겸 점심을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 푸드코트가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갓 구운 빵 냄새와 커피 향이 뒤섞여 침샘을 자극했다. 나는 커피 한 잔과 BLT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시간과 공간이 주는 여유를 만끽했다.
식사를 끝내고도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잡지를 뒤적이며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가을맞이 쇼핑이나 좀 해볼까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쇼핑몰을 걷기 시작했다. 쇼윈도에 디피 된 옷들을 구경하며 몇 개의 매장을 지나쳤을 때 갑자기 몸속에서 긴급 상황을 알리는 미세한 압력이 느껴졌다. 카페인 덕분인지, 샌드위치의 치즈 때문인지 상황이 급해진 나는 재빠르게 화장실 픽토그램을 찾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화장실 사인이 보였고, 나는 메장들 코너에 위치한 화장실 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화장실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좌회전을 하는 찰나, 내 눈앞에 상큼한 복숭아향기를 풍기는 긴 생머리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나보다 한 걸음 앞서 걷고 있는 그 실루엣은 독보적이었다. 매직 스트레이트를 했는지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쇼핑몰의 노란 조명을 받아 검은 벨벳처럼 보였다. 머리끝은 허리까지 왔고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 윤기가 흘러 반짝이기까지 했다. 한 폭의 광고를 보는 것 같은 장면에 눈이 부셔 잠시 걸음을 멈칫 했다.
머리를 찰랑거리며 걷는 뒷모습은 내가 이제껏 보아온 청순함과 우아함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심결에 '와, 머릿결 정말 좋다. 엘라스틴 하셨어요?"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그런데 그 완벽한 뒷모습이 망설임 없이, MEN이라고 써진 남자 화장실 입구로 방향을 트는 것이 아닌가.
'스마트폰을 보며 걷다가 헷갈린 건가? 아니면 너무 급해서 착각했나?'
나 역시 급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 공공장소에서 낯선 이에게 닥칠 수 있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내가 막아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발동했다. 나는 서둘러 잰걸음으로 따라붙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저기요! 거기 남자 화장실인데요....!"
내 목소리는 낭랑하게 목표지점에 전달되었고, 실크 머릿결의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웅성거리던 대형 쇼핑몰의 시끄러운 소음도,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도, 급했던 생리현상도 일시 정지되는 것 같았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날렵한 턱선과 구릿빛 피부, 선글라스를 받치고 있는 오뚝한 코, 그리고 그 아래... 빼곡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이라니?'
그것은 내가 방금까지 청순함의 표본으로 단정했던 모든 환상을 단숨에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내 앞에는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콧수염을 단정히 기른 카리스마 넘치는 상남자가 서 있었다.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고, 심장은 헤비메탈 박자에 맞춰 펌프질 했다.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에 입술이 떨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을까? 아니면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 그런 걸까? 콧수염의 남자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후, 부드럽게 말했다.
"네~. 여자 화장실은 저쪽이고요~!"
그가 낮은 바리톤 음성으로 마치 안내 데스크 직원인 듯, 무심히 내 말을 받아치는데... 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뒷모습만 보고 그만...."
살짝 미소를 보이던 그 남자는 선글라스를 다시 올려 쓰고는 유유히 남자 화장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여자 화장실은 저쪽'
그의 차분한 한 마디는 나에 대한 조용한 배려이자, 내 편견에 대한 가장 쿨한 방식의 일침이었다.
주변에서 몇몇 사람들이 우리 쪽을 흘긋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굴욕적인 존재가 되었다. 사과나 변명 그 어떤 것도 상황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이 공간에서 사라지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화장실이 급했지만, 그 콧수염 남자와 같은 공간에 들어가기에 내 간은 너무 작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최대한 빨리 걸었다. 복도를 따라 최대한 멀리 도망친 후에야, 다른 화장실로 피신했다.
그 이후로 쇼핑몰이나 지하철 등 공공화장실 근처에만 가도 혹시 그 남자를 또 만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거리를 걷다가 긴 생머리를 봐도 조건반사적으로 콧수염의 유무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날의 사건은 내가 그동안 가지고 살아온 편협한 시야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긴 생머리는 여성을, 콧수염은 남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의 편견이 뒤집혔다.
세상은 다채롭고 입체적이라는 것!
스타일은 개인의 취향이자 자신의 표현이라는 것!.
그날의 짧은 '선의의 오지랖'이 자칫 상대를 규정하며 폭력을 휘두른 무례함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깊이 부끄러웠다. 쿨하게 상황을 정리해 준 그의 무심함에 담긴 존중을 배우며, 나는 단호하게 결심했다.
'타인의 개성 또한 그들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 자신이 타인의 틀에 갇히는 것을 윈치 않듯, 타인을 섣불리 규정짓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공감 능력이다. 이 굴욕적인 흑역사는 나를 성장시킨 값비싼 교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