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는 늘 자신감이 없는 그림자 같은 아이였다. 아마도 타고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또래보다 훨씬 작은 키와 깡마른 체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늘 벽에 기대거나 모퉁이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가장 편했다. 운동회 날에도 구석에 앉아 다른 친구들의 경기를 응원하는 걸로 만족했고 발표는커녕 누가 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단체 생활'이 나의 자신감을 키워줄 것으로 굳게 믿으셨다. 억지로라도 운동도 시켜보고, 합창단에도 넣어봤지만 결과는 뻔했다. 선천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그곳에서 더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준비가 없는 단체생활은 나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나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당하게 했다. 나는 여전히 단체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알 수 없이 흔들리는 '미물'일뿐이었다.
이런 내가 조금씩 변하게 된 계기는 바로 마블 히어로 무비 덕분이다.
부모님은 유일하게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나를 극장에 많이 데려가 주셨다. 그 어둠의 장소는 내가 유일하게 숨 쉬는 듯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스크린 속에서 솟아오르는 히어로들의 모습은 분명 내가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영웅담을 통해 나도 '이 세상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불꽃을 만들며 성장기를 보냈다.
특히 마블 코믹스의 만화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나의 슈퍼 히어로에 대한 동경은 집착에 가까워졌다. 캡틴 아메리카의 정의감과 리더십, 아이언맨의 번뜩이는 지능과 창의성, 토르의 강력한 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스파이더맨의 유머와 민첩성 등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배워야 할 숙제로 여겨졌다. 특히 스파이더맨은 나와 마찬가지로 소심하고 어색한 십 대였다는 점이 나를 그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대학을 간 후에도 강의실 맨 뒤에 앉아 이번 학기 학점이나 걱정하던 나에게, 그들의 존재는 대리 만족을 넘어, 내가 되고 싶은 이상향이었다. 나는 그 세계관에 심취했고, 코스튬 뒤에 숨어 단 하루만이라도 그들처럼 당당하게 세상을 마주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어느 날, 용산에 위치한 마블 컬렉션 스토어에서 피규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마블 코스튬으로 완벽하게 분장한 한 세 명이 당당하게 가게로 들어왔다. 그들을 토르, 나타샤, 배트맨으로 분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토르, 망치 새 걸로 바꿔야겠던데?"
"어 그래야지. 나타샤."
"근데 배트맨은 마블 아니지 않냐? 오늘 왜 따라온 거야?"
그들은 서로를 토르, 블랙 위도우의 나타샤, 배트맨으로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이 신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절대 먼저 말을 붙이지 못하는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저도 마블 팬인데요. 혹시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처럼 할 수 있나요?"
잠시 황당한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저희들은 다음 코스튬 동호회 멤버들이에요. 관심 있으시면 우리 동호회에 가입하셔서 활동하시면 돼요."
나랑 좋아하는 게 비슷한 사람들이 온라인에 있었다니. 그동안 나는 왜 이런 데 가입해서 활동할 생각을 못했을까. 왠지 이들과 함께 하면 나의 모습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도 생길 것 같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당장 그 온라인 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때까지도 가슴이 떨리는데 그들에게 말 걸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온라인에서 나의 활동은 오프라인과 완전히 달랐다. 직접 대면하지 않을 때 나의 자신감은 300%에 달한다. 가입인사에 Q&A 답변에 나의 소개까지, 일사천리로 나의 임무를 수행하고, 매일 들어가 활동을 했다. 점차 비중 있는 비중 있는 운영진들과 우수 회원들은 점차 내 닉네임에 익숙해져 갔다.
'스파이더샤이맨'이 바로 나의 닉네임이다. 대부분 회원들은 내 글을 읽고 내가 전혀 '샤이'하지 않을 것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온라인에서의 나는 마치 다른 자아를 장착한 듯 당당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오프라인 모임에 매번 참석했다. 정모에서는 각자 맡은 캐릭터의 말투, 행동, 특징적인 포즈를 최대한 유지하며 행동한다. 마스크 덕분인지 나는 평소와 달리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특별한 날에는 배역을 정해 간단한 롤플레이를 연기하기도 하지만, 모여서 단체 사진을 찍고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게 대부분이다. 코스튬을 직접 제작한 친구들은 의상이나 소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제작 과정이나 재료에 대한 팁을 공유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임에 푹 빠졌다. 취미를 이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소속감과 자신감을 얻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회사에 들어와 내 밥값을 하고 있는 것도, 다 대학교 때부터 활동한 이 동호회 덕분이리라.
코스튬 동호회의 최대 명절은 바로 할로윈이다.
9월이 끝나기 무섭게 일찍부터 어떻게 꾸미고 광장에 나갈까 어떤 컨셉으로 모임을 할까 의논이 시작된다. 우리 팀은 어벤저스처럼 함께 무리 지어 퍼레이드를 하기로 했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차려입고 홍대입구로 향했다.
연트럴파크를 함께 걸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우리들 주위를 둘러싸며 사진세례를 퍼부었다.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신이 난 나는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발사하는 포즈(Thwip!)를 능숙하게 취하며 그 순간을 만끽했다.
문제는 과한 몰입이었다.
점점 더 팔과 다리를 크게 움직여 역동적인 액션을 취했다. 그러다 하필 그때, 옆을 지나가던 일반인 무리와 부딪히고 말았다. 정확히는 내 팔꿈치가 그중 한 명의 등을 강타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본능적으로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채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민망한 포즈로 사과하며, 내 입에서는 회사원 허 주임의 평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부딪힌 사람을 얼르며 감싸던 무리 중 한 명이 나를 휙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어! 허 주임님 아니세요?
맙소사. 유 사원. 회사에 들어온 지 3개월 된 신입사원, 그 유 사원이었다. 연트럴파크 인파 속에서 나는 거미줄 대신 운명의 덫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이 끔찍한 상황에, 코스튬 뒤에 숨어있던 나의 본모습이 발각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손사례를 쳤다.
"아...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유 사원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마스크를 쳐다보며 집요하게 물었다.
"허 주임님 목소리가 확실한데... 스파이더맨 완전 팬이신가 보다. 히힛"
온몸의 피가 없어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스파이더샤이맨'이라는 나의 비밀스러운 자아가,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회사 동료에게 발각되다니. 그것도 타인의 등짝을 때린 당황스러운 상황에 말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없었다. 주변의 웅성거림과 나를 향한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돌아 뛰었다. 수많은 인파 속으로 줄행랑을 쳤지만 내 모습은 사람들을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동호회 사람들도 당황해서 그 상황을 대처해주지 못했다.
지하철 보관함에 들어있던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마치 영혼이 가출한 것 같은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코스튬이 들어있는 종이백을 구석에 던져버리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자신감 있게 'Thwip!'을 외치던 자신감 뿜뿜 스파이더 맨은 마스크를 벗고 다시 샤이맨으로 돌아왔다.
창피함이라는 거대한 감정 앞에 나의 자신감은 온 데 간 데 없이 움츠러들었다.
내일 회사에서 유 사원의 눈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그녀가 나에게 인사하며 '스파이더 맨의 거미줄은 안녕하냐'라고 물을 것 만 같은 상상을 했다. 벌써 얼굴이 화끈거린다.
후...
내일이 오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차라리 타노스가 이 지구를 침공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