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터질 것 같은데 '이 옷은 꼭 사야 해!' 합리화

by 유로운자

출근시간.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오늘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당장 옷을 입고 집을 나서야 지각을 면하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내 옷장에는 수많은 옷들이 언제가 입혀질 날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어떤 옷들은 여전히 가격표를 달고 행거 중간에서 존재감을 알렸다. 옷은 넘쳐나는데, 늘 입을 옷이 없는 결핍이 나를 짓누른다.


어디서 보니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챙겨두면 좋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어림없다. 아침이 되면 마음이 바뀌기 때문이다. 어제 골라둔 옷을 뒤로하고 다시 오늘의 기분에 어울리는 옷을 찾기 시작한다. 177벌의 옷이 쑤셔 박힌 옷장에서 '오늘의 착장' 한 벌을 찾는 임무가 주어진다.


옷과 씨름을 하다 보면 내가 꼭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오래된 추억의 옷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세상에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지른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옷 쇼핑에 중독이 된 건 아니었다.

아무런 취미가 없던 나에게 일상은 늘 집, 회사, 집, 회사, 가끔 회식.

매우 단조로웠고 내 안에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연락하는 사람은 회사 직원들 뿐이었다. 누군가 같은 부서에서 일하다가도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되니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기보다는 얕고 일시적인 관심으로 만족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을 조금씩 메우기 시작 한 건 헬스장을 다니게 되면서부터였다. 매일 저녁 9시에 함께 모여서 운동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나도 매일 그 시간에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친화력 좋은 그들이 먼저 챙겨주자 소속감을 느꼈다. 새로운 운동복을 입고 갔을 때 얻게되는 그들의 칭찬과 관심이 나의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치료제였다.


나는 헬스장에서 단백질과 근육이야기만 하는 줄 알았다. 운동 후 어떤 화장품이 피부에 좋다느니, 어느 브랜드가 핏을 살려주는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나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들 무리에 끼기 위해 나 또한 공동구매에 참여했다. 그렇게 쇼핑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온라인으로 옷을 구경하는 게 습관이 들어버렸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데 옷을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눌렀다.


운동복은 색깔별로, 셔츠는 요일별로 샀다.

마음에 드는 옷이 품절되면 사지 못하게 될까 하는 불안함이 나를 사재기하게 만들었다. 프레젠테이션이나 파티 등 특별한 날을 위해 미리 구입한 옷들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날이 오면 특별함 대신 가장 익숙하고 안정적인 무난한 옷을 입고 나갔다. 옷장 가득한 화려한 옷들은 그렇게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할 채 그들만의 파티를 열었다.


옷더미를 헤치다 겨우 고른 셔츠와 트라우저를 입고 나오니, 현관에는 어제 도착해 뜯지도 않은 옷 택배 상자가 세 개나 놓여있었다. 마치 '이곳을 그냥 지나치겠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위용을 드러냈다.


"아, 새로 산 옷을 입을까?"


택배를 뜯어 바지 허리에 붙은 택을 떼어냈다. 입었던 바지는 벗어 소파에 던져두고 새 슬랙스로 갈아입었다. 현관 입구에 있는 거울을 보니 셔츠와도 은근 잘 어울렸다.


"오 괜찮은데!"


급하게 집을 나선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전력질주를 했다. 카카오지도에서 지하철 시간을 체크하며 발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플랫폼에 도착하니 벌써 출근 지옥 열차에 올라탈 지원병들이 네 줄로 떼 지어 서있었다. 내 한 몸도 군중 속에 밀어 넣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발이 거의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지하철에서 내린 후 출근시간 3분을 남겨두고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3분이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며 보니, 아는 얼굴이 ‘방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 며칠 전 외근 가서 만났던 거래처 직원 '조인'씨였다.


"어, 안녕하세요! 저희 부서 오신 건가요?"

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네. 출근 중에 부장님이 연락하셔서 이리로 바로 왔어요."

"아, 그러셨군요."


이런 대화가 오가는데 띵동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얼른 7층을 눌렀다.

침묵이 어색해 연신 미소를 지으며 벽에 붙은 광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허저 씨."

"네?"


"바지 새로 사셨나 봐요."

"아, 어떻게 아셨어요? 월급 받아서 하나 장만 했습니다. 하하하"


"아, 근데 거기 스티커가."

"앗!"


깜짝 놀라 허리 부분에 손을 갖다 댔다. 분명 아침에 집을 나서며 택을 제거했는데.


"아, 거기 말고 바지 뒤예요. XL 스티커가 붙어 있어서..."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하. 급하게 나오느라 허리에 달린 택만 떼고 바지 뒤에 붙어있는 길쭉한 사이즈 스티커를 떼지 않은 것이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벌거벗은 듯한 느낌이 이런 건가.


얼른 스티커를 주욱 뜯어내 구겨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걸 집에서부터 계속 붙이고 회사까지 오다니…

나의 불안정하고 어리숙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녀와 나, 둘만이 존재하고 층 숫자는 3을 표시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왜 이리 느린 건지.


겨우 사무실 도착해 내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내 옆을 지나 회의실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하주종일 머리를 쥐어뜯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왜 그런지 그녀 앞에서 자꾸 실수를 하게 되는 내가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자리 동기 '주태'가 축 쳐져 있는 나에게 눈짓을 하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했던 나의 연기는 엑스라지 스티커 한 장 앞에 처참히 무너졌다.


'오늘 집에 가서 무조건 옷장 정리를 하리라, '

'이제 절대 급하게 새 옷을 입고 나오지 않으리라.'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되지 않는 옷장 대신, 내 안의 공허함을 직면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옷장 가득한 옷들은 구입버튼을 누를 때만 나를 위로할 뿐, 나의 숨겨놓은 불안함의 증거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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