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는 옷장과 세탁기의 중간기착점

by 유로운자

아침부터 저지른 실수 하나가 하루 종일 발목을 잡았고 멘탈은 진흙처럼 뭉개진 채 부사장님의 업무지시에 시달렸다. 겨우 야근을 끝내고 턱까지 흘러내린 다크써클을 붙잡고 퇴근을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내 머릿속은 전원을 끈 것처럼 멍해졌다. 의식의 흐름대로 신발과 양말을 동시에 벗고, 셔츠를 벗어 들고 옷장으로 향하려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이걸 세탁기에 넣어야 하나, 아니면 행거에 걸어둬야 하나?'


이미 하루 종일 수많은 결정으로 에너지를 잃은 내 뇌는 이 사소한 결정조차도 힘겹게 느껴졌다. 온 세포가 더 이상은 무리라고 경고등을 켰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며 남은 감정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지친 뇌가 찾은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은 그 옷을 지금 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셔츠를 쥐고 있던 손의 힘만 풀어도 완성되는 에너지 최대 효율의 방식이다. 셔츠는 내일 다시 입을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계획과 함께 소파 위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이미 아침에 벗어놓은 바지가 머물고 있던 바로 그 자리. 그곳은 자연스럽게 옷장과 세탁기의 중간기착점이 되었다. 결정을 미루니 비로소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진 듯했다. 나는 그 옷들을 외면하고 소파 한쪽에 쓰러졌다.


다음 날 아침.

아날로그 알람 시계가 전장의 나팔처럼 울부짖고, 시계 초침은 정말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피로에 못 이겨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블랙아웃 되었던 나는, 또다시 시작된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피로를 마른세수로 털어낸다.


샤워 후 옷장 문을 열고 그 안의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늘의 답을 찾느라 허우적 거린다.

'오늘은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어젯밤 가장 편안한 쉼을 위해 회피했던 선택의 과정을 오늘 아침, 가장 바쁜 시간에 기꺼이 다시 소모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제 아낀 에너지는 이렇게 아침부터 매우 비효율적으로 소진되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골라 입고, 전쟁터 같은 집을 벗어나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소파 위의 셔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젯밤 '내일 또 입을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명분으로 '중간 기착지'에 보류해 두었던 바로 그 옷이다. 그 옷을 보는 순간 자각이 들지만, 이미 나에게는 결정을 번복할 여유가 없다.


나는 그 옷을 애써 외면하며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그렇게 내가 회피했던 '결정의 결과물'은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처럼 그 자리에 남았다.


그날 하루 종일, 소파 위에 힘없이 내려앉아있던 옷들은 마음 한구석에 짐처럼 남아있었다.

'잠깐 움직여서 세탁기에 넣고 왔으면 될 일인데...' 하는 게으른 후회가 순간 스치기도 했다.

'이따 퇴근하면 꼭 처리해야지.' 하며 희미하게 다짐을 했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DMZ를 넘듯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나는 비로소 몸과 마음의 긴장이 완벽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집에 돌아올 수 있는 사실 자체 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과 안정감을 주는지. 나만의 반공호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모든 책임과 결정의 적들은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차단된다. 나에게 집은 완벽한 안식처이자 피로한 세상으로부터의 방어막이다.


퇴근 후 느껴지는 그 더없는 심리적 이완 앞에서, 옷을 정리하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은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노동이었다. 가장 에너지를 적게 쓰는 일이 언제나 승리한다. 전날 밤 옷을 던져두며 얻은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너무나 달콤해서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나의 무의식은 이 행동을 반복했다.


'날 잡아서 한 번에 정리하면 되겠지.'

'한번 더 입으면 되니까 굳이 옷장에 넣을 필요 없겠지.'

이런 무의식적인 논리에 나는 완벽히 설득되었고, 소파 위 옷들은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면서, 소파 한쪽은 본래의 휴식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평평하던 '중간 기착지'가 점점 다양한 색깔들이 층을 이루는 언덕이 되어갔다. 처음 하루 이틀은 소파를 차지한 옷들에 신경이 좀 쓰였지만, 점점 날이 쌓여가니 이 모습이 일상의 배경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그 쌓여있는 무질서의 흔적들이 지친 나에게 '이 정도는 해도 괜찮아. 다들 그러고 살아.' 하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무질서가 언젠가는 내 삶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 한계가 있다. 그것을 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이 귀찮음이라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


내 안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하나는 천사의 목소리

"지금 잠깐 10분만 투자해. 옷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내일 아침에는 훨씬 더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은 곧 너의 내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목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악마의 목소리가 유혹한다.

"괜찮아,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지? 넌 지금 쉬어야 해. 어차피 정리해 봤자 내일 또 쌓일걸? 그 에너지를 아껴서 진짜 중요한 일에 써."


대부분 나는 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소파 위 옷더미를 외면하고 잠자리에 든다.

즉각적인 만족감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깐의 심리적 해방이 아닌, 진정으로 흐트러진 삶의 리듬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 작은 언덕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행동은 단순이 옷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용기 있는 첫 발걸음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 결심했어! 그 용기 있는 발걸음은 음... 오늘 말고 내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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