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사람과 상상의 영화 시나리오 제작

by 유로운자

금요일 오후 6시.

컴퓨터 전원을 망설임 없이 껐다.

종합식품기업 마케팅팀 '허저' 주임의 삶은 이 순간부로 강제 종료된다. 가방을 메고 이미 발디들 틈 없는 퇴근 지옥철에 몸을 끼워 넣은 나의 마음은 이미 주말을 향해 전력질주 한다. 나의 진짜 삶은 이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 10시.

평일 출근길보다 훨씬 경쾌한 발걸음으로, 큰 길가에 위치한 넓은 북카페 2층 창가 자리로 향했다. 매주 출근도장을 찍는 나에게 이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스팅 디렉터 사무실이자, 끝없이 상상이 이어지는 영화 스튜디오다. 직장에서는 엑셀 시트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이미지와 숫자로 채우지만, 이곳에서는 고급 가죽 노트에 만년필로 나의 진짜 꿈인 시나리오를 쓴다.


창밖은 따사로운 햇살에 조명을 켠 듯 화려하다. 곧이어, 주문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베이컨 에그 샌드위치가 테이블에 놓였다. 갓 내린 커피 한잔의 카카오 빛 진한 향이 평일의 피로를 씻어내고, 창작의 엔진을 가동한다. 목으로 넘어가는 뜨거운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하며 주말 의식을 시작한다.


샌드위치로 든든히 배를 채운 후, 펜을 들고 내 상상력을 채워줄 주연들을 기다렸다.

첫 번째 오디션 참가자는 한 손에는 등산 배낭을, 다른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정장 차림의 남자다. 나는 그를 보고 메모를 시작했다.


'주말에도 잘 다린 고급 네이비 정장을 입은 남자. 햇살에 반짝이는 구두. 그럼에도 한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등산 배낭을 들고, 여유 있게 한잔의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주말에도 일하러 나가는 직장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분명 평일에는 평범한 노무사로 일하지만 주말에는 킬로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저 배낭 안에는 분명 무시무시한 도구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업계에서 이름은 나있지만 얼굴은 아무도 모르는, 그래서 저렇게 여유롭게 큰 길가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코드명 EX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는 그의 걸음걸이와 표정 변화에 대한 상상의 기록을 노트에 채워갔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나에게, 이 모든 상상과 기록은 치열한 창작 연습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 후 미지근 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두 번째 오디션 참가자 등장.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된 갈색 코트에 플랫 슈즈를 신은 긴 생머리의 여성이 잰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는 모습이다. 불안함으로 가득 찬 눈망울, 굳게 다문 입술이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직감했다. 이 여자는 분명 방금 지나간 킬러와 연관 있는 인물이다.


재빨리 그녀에 대해 기록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분명 중요한 단서를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작고 얇은 갈색 서류 봉투. 그것은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단서일 것이다. 그녀가 그의 위험을 알게 되고 그를 막거나 함께 도피하기 위해 지금 그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다.


'아, 아니다. 이것보다는 그녀도 같은 소속의 요원이라고 설정을 해볼까?'


조직의 말을 듣지 않는 그를 처치하라고 그녀를 보냈지만, 차마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에 죽일 수 없다. 그래서 그를 해외 도피시키기 위한 서류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같은 주연을 가지고도 액션 활극, 또는 로맨스 스릴러, 공포물까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게 이 순간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더욱 빨리 손을 움직였다.


그녀를 살피며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김없이 기다리던 배우가 등장한다.


매주 토요일 11시 30분, 변함없이 그 시간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나의 심장은 고동쳤다.

바로 이 동네 홍반장님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홍반장님이란 애칭도 물론 내가 지은 거다.


홍반장님은 오늘따라 더욱 단호한 표정으로 행동을 시작한다. 허리를 굽혀 보도블록 사이에 낀 담배꽁초들을 줍고, 맨홀을 들어 올려 그 안에 있는 쓰레기를 들어낸다. 그 안에서 나오는 오물을 보면, 어떻게 저런 게 저기 들어갔을까 싶은 것들도 있어 씁쓸하다. 혼자서 묵묵하게, 그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해낸다.


매주 그를 보고 있자면 인생의 성자가 행동으로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홍반장님 앞에서 방금까지 써 내려간 킬러며 요원이며 하는 키워드와 문장은 유치한 막간극에 불과했다.


오늘도 홍반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첫 행사를 마친 홍반장님은 마주 오는 모든 이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가 지나가는 모든 곳은 깨끗하고 평화로워졌다.


카페 사장님이 시원한 커피 한잔을 들고 밖에 나가 홍반장님께 권한다. 몇 번 사양하시던 홍반장님은 마침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여유로운 한 모금을 음미하신다. 햇살이 그의 이마에 비추니 마치 반가사유상을 마주하는 듯 경건해진다.


그의 모든 동작을 보며 만년필을 움직이다 보면, 뭔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홍반장님은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나의 지친 영혼에 손을 잡아주는 스승처럼 느껴진다. 그와 대화를 해본 적도 없지만, 매주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지혜를 조금씩 배우는 것 같다.


내 노트에는 그를 향한 찬사와 존경들로 채워진다. 물론 부끄러워 실제로는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진심을 지면 위에 나열하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한다.


이제 집에 갈 시간.

펜 뚜껑을 닫고,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일어서는 순간.

"어이~ 맞구나. 허저! 야 오랜만이다."

잠깐 누구지 했다가 이내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라고 하기엔 친하지 않았던) '이엄'이었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여긴 어쩐 일로..."

"우리 아버지가 이 동네 사시거든. 왔다가 창밖으로 너를 본 것 같아서 올라와봤어."

"와, 눈썰미 좋네."

"그래. 뭘 그렇게 쓰고 있었던 거야? 우리 아버지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던데."


이럴 수가. 홍반장님의 아들이라니. 내 머리카락들이 모두 순식간에 하얗게 샌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킬러와 요원의 시나리오, 골목 현자 예찬가를 열심히 쓰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나의 아지트가 발각되는 순간 같았다.


"아니, 그게..."

나는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민망함에 노트를 덮으려고 손을 움직이려는 찰나 '이엄'은 내 노트를 먼저 집어 들고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게 뭐야? 뭘 그렇게 열심히 썼던 거야?"

나는 노트를 숨기려고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엄은 재빠르게 내 노트를 낚아채듯 펼쳐 읽어 내려갔다.


"홍반장님이 담배꽁초를 줍는 모습에서 애민정신을 발견했다? 그가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 같았다? 오 마이 갓. 우리 아버지를 보고 이런 걸 썼다고? 하하하"


이엄의 웃음소리가 북카페의 가사 없는 멜로디를 뚫고 2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의 진심 어린 다큐가,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관객에게 코미디로 읽히는 순간이었다.


"야 너 좋은 회사 다닌다더니 그만둔 거야? 이런 걸 쓰고 있게. 우리 아버지가 철학자라도 되냐?"


내 얼굴은 귀까지 빨개져 얼얼했고 그 자리에서 땅속으로 가라앉고만 싶었다.


나의 가장 은밀한 상상 속의 영웅이자, 스승님을 바라보며 몰래 동경하는 일은 오늘이 마지막임을 깨달았다. 다시는 이곳, 이 창가 자리에서 홍반장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없으리라. 나의 비밀 아지트를 무참히 없애버린 이 엄이 야속했지만, 가장 완벽한 관객에게 들켜버린 일을 누구에게 탓하겠는가.


창피함은 잠시, 하지만 나의 주말 일탈과 창작 의지는 계속될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나의 상상 스튜디오를 먼 동네로 옮겨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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