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기 자랑할 때, 속으로 생각한 말이 튀어나옴

by 유로운자

내 입에서 그 세 마디가 나왔을 때, 회의실 안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웅성거리던 직원들의 브레인스토밍도, 잔잔하게 흐르던 배경음악 소리도, 훈계와 자랑의 중간점에서 저울질을 멈추지 않던 엄 대리(님)의 목소리도.


내 입에서 튀어나온 세 마디는 이거였다.

'쫌! 적당히 해라!'


물론 소리는 작았지만, 이 공간을 폭풍의 눈 속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데시벨이었다.

그래. 그때 나는 미쳤었다. 머릿속으로만 외쳤어야 할 비명을 급기야 바깥으로 내뿜었던 것이다.

정적이 흐르는 3초의 시간. 나에게는 죽을 만큼 민망하고 후회로 가득 찬 순간이었다.


아침 미팅 시간.

회의실 안은 에어컨의 상쾌한 온도에도 묘한 긴장감으로 후끈했다. 유리벽에 붙은 컬러풀한 포스트잇과 윈도 마커로 그린 아기자기한 그림이 신입사원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뽐내고 있었다.


"와,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요?"

나는 회의실로 들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젠지 세대를 위한 타깃 마케팅 전략'에 대해 발표를 앞둔 신입사원들은 저마다 태블릿을 펼쳐 마지막 점검을 하는 듯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밤새 고민한 흔적들과 함께 자신의 아이디어가 선정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스며있었다.


윗선에 보고하기 전 사원, 주임, 대리급까지만 먼저 모여 자유롭게 돌아가며 자신의 생각을 공유한다. 누구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덧붙이기도 하고, 발전시켜 보자는 취지로 회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회의를 주도하는 엄 대리(님)의 태도에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다.

회의실에 마지막에 들어오며 엄 대리는 말했다.

"자, 유 사원부터 시작해 보죠."


엄 대리는 팔짱을 끼고 유 사원의 발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포스트잇 흝어보더니 말했다.

"이건 아니야. 이것도 구려."

급기야 포스트잇을 떼어 공중에 던지며 덧붙였다.

"유 사원. 젠지들에게 메타버스가 요즘 유행하는 건 알겠는데, 내가 전에 뉴욕 출장 갔을 때 좀 알아봤거든? 그거 벌써 미국에서 유행 한 물가고 우리나라에서도 끝물이야. 투자 대비 효율 알지?."


유 사원의 얼굴은 이내 굳어서 무표정이 되었다.


"다음, 관 사원. 발표하세요."

엄 대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관 사원의 아이디어 구역으로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드로잉과 포스트잍을 읽어보던 엄 대리는 관 사원의 발표를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관 사원, 에코 프로젝트? 이거 직접 사본 물건 있어? 이건 요즘 이 회사 저 회사 안 하는 데가 없어. 친환경 취지야 좋지. 근데 젠지들한테 안 먹히는데 어쩔 거야. 친환경 달면 가격은 비싸지고, 결국 고객들은 가격 보고 비싸면 안 사는 거 몰라?"


관 사원도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음, 장 사원. 아이디어가 다 왜 이래. 뭐 좀 쌈빡한 거 없니? 신입이라며."


"대리님, 제가 Z세대 분석을 해보니 틱톡이나 숏폼 콘텐츠로 소비가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 진짜, 장 사원. 내가 틱톡도 해봤잖아. 그거 콘텐츠 만드는데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줄 알아? 장 사원이 다 찍어서 편집하고 올릴 거야? 우리 마케팅팀 인원도 감축한다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 자신 있어? 내가 전에 직원들이랑 유튜브 채널도 한 번 해보려고 시도해 봤다가 접었어. 진득하게 유튜브 영상을 제작해서 수익이 날 때까지 시간과 여유를 안 주는데 어쩔 거야. 좀 가르쳐 놓으면 퇴사하고. 다 시간 낭비라니까."


엄 대리(님)의 '내가 해봤는데' 레퍼토리는 꼬리를 물고 신입사원들의 아이디어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모든 아이디어는 엄 대리의 과거 경험이라는 거대한 필터를 통과해야만 했다. 신입사원들은 점점 의기소침해서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야심 찬 제안은 회의실을 나가기도 전에 엄 대리의 검열에 묵살당했다.


후끈하던 회의실 공기는 차갑게 식어 히터를 틀어야 할 것 같았다. 창의성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공간은 어느새 거품 빠진 맥주처럼 식어버렸다.


엄 대리는 분위기 파악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해보거나 들었던 것들을 계속 나열했다. 또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취했는지 자신이 다녀온 미국, 유럽의 도시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내가 실리콘밸리에 출장 갔을 때 이미 다 파악하고 왔던 것들이야. 이런 거 컨설팅 회사에서도 손사래 치는 내용들이야. 다른 회사에서도 해보고 다 망했다고 하더라고. 내가 영국 국제 음료 박람회도 나갔었잖아. 유럽에서 한동안 에코 프렌들리 엄청 유행했거든. 근데 뭐야, 에코백 100개 사고, 텀블러 50개씩 사잖아. 겉으로는 환경의 중요성 얘기하지만, 결국 사람은 다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가 사고 싶은 건 다 사게 돼있다니까? 우리는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마케터의 눈으로 접근해야 돼."


끝이 없는 자랑과 훈계가 이어졌다. 그가 세계 여러 도시를 오가며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 그래서 지금 신입사원들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자신의 눈높이에 차지 않는지를 굳이 설명하고 있었다. 신입사원들은 이미 체념한 표정과 멍한 눈으로 벽만 응시할 뿐이었다.


나 역시 더 이상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이 레퍼토리를 많이 들어온 데다 오늘은 신입사원들의 사기까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그래도 상사에게 따질 수는 없어 머릿속으로만 제발 좀 그만하고 끝내라는 생각만 되뇌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그 강도가 세지더니 급기야, 내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쫌! 적당히 해라!"


회의실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그 찰나의 정적.

마치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 대리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꽂혔다. 그의 얼굴에는 방금까지 우쭐대며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던 모습은 사라지고,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 주임,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망했다. 심장이 전기충격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섬뜩함.

'뭐라고 수습해야 하지?'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은 비상 경고음을 울리며 최대 출력을 냈다. 이미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야 했다.


"아, 아닙니다. 엄 대리님. 여자 친구에게 카톡이 왔는데 계속 잔소리를 해서 그만.... 회의에 집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조차 감탄할 정도로 내 입은 거짓말을 술술 하고 있었다. 변명은 더듬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이어졌지만, 내 얼굴은 이미 불타 오르고 있었다.


엄 대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입사원들은 각자의 태블릿 화면을 보는 척, 입을 틀어막고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엄 대리는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결국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에 집중 좀 합시다. 오늘은 여기까지. 디벨롭해서 내일 아침에 다시 모이는 걸로."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간 엄 대리의 뒷모습에는 불쾌함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다른 직원들은 억눌렀던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웃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허 주임, 괜찮아요?"


'하~'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이마에 얹은 채 의자를 뒤로 젖히며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회의실 공기 속에서 나 혼자 불덩이가 되어 이 공간을 데우고 있었다.


내일 아침 회의에 참석할 자신이 없다.

'내일 그냥 아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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