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모 Oct 15. 2015

몽콕의 붉은 택시

외로움으로 여행하기 #2


준비 없이 도착한 홍콩에선 4일 내내 부슬비가 내렸다. 문득 펼친 여권 속 내 사진 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날씨가 내내 계속되었다.


투둑 투두둑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비는 종일 부지런 내렸다.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거리의 질척한 보도블럭은 태초부터 젖어있어 마치 단 한번도 말라본 적이 없는 듯 느껴졌다. 움푹 패여 비가 고인 웅덩이에 몽콕 거리의 현란한 불빛들이 떨어져 어지럽게 반짝였다.



사실, 날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맑은 하늘, 아름다운 홍콩의 해변을 기대하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기에. 며칠간의 방황이라는 핑계로 그저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고,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금의 내 삶이 건강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보고 싶을 뿐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관대해 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산 없이 눅눅한 몽콕의 야시장을 걸었다. 궂은 날씨임에도 쾌활한 표정의 상인들로부터 빨간 다기 세트 하나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고 쓸데없는 ‘브루스 리’인형을 구입했다. (심지어 이 인형은 받침대 위에서 360°회전이 가능했다.) 지인이나 가족에게 선물할 용도로 고르긴 했지만,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물건들. 오른손에 묵직하게 들려있는 그것들은 감동 없이 무미건조한 나의 일상과 닮아 있었다.


몽콕의 붉은 택시 / 2013


그날 그 밤의 거리는 한편의 로드무비 같았다. 이 영화에 출연자들 중 분주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날씨 탓에 뜸해진 손님을 붙잡으려는 상인들도, 'Miss India' 라는 팻말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던 인도 청년도, 귀가하는 손님들을 붙잡으려는 빨간 택시각자의 치열한 하루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인생은 저들의 것 만큼 열정적인가. 나의 하루는 저들의 것 만큼 충실한가. 현실의 문제를 회피해 온 여행 속에서 난 철저히 비호감 캐릭터였다.

화려한 몽콕. 그 채도 높던 축축한 거리에 나홀로 무채색이었다. 계속해서 NG를 내고 있는 내 마음은 어딘가 단단히 고장나 있었다.


매거진 '외로움으로 여행하기'는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의
프리퀄(Prequel)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견뎌내야 할 시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