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 시렸던 지난겨울, 세상이 꽁꽁 얼어붙던 그 계절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드라마 작업을 제안드리려고 해요."
JTBC 드라마 조연출의 연락이었다. 통화의 요지는 말 그대로 드라마 제작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약 10 여분 동안의 대화를 통해 대략의 설명을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드라마 내에서의 구체적인 역할이 머리 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지가 않았다. 제작진과의 첫 만남은 그로부터 며칠 후 지하철 태릉입구역 근처의 조그만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흰 눈이 폴폴 날리던 그 날 조연출로부터 드라마 전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미팅이 진행될수록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럴수가, 드라마 안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컸다.
드라마의 타이틀은 <스케치>였다. 굳이 정의하자면 장르는 액션 스릴러물이라고 해야 할까. 무의식 상태에서 범죄 현장과 단서들을 스케치북에 그려내는 여형사가 있고, 그녀가 그린 결과물들이 3일 내의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된다는 콘셉트이었다. 드라마는 스케치를 통해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예방하는 특수수사 전담팀의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이었다.
멋대로 뛰기 시작한 가슴이 좀처럼 가라앉지 못했다. 가끔 다큐에 게스트로 참여하거나 방송에 사용될 작은 삽화를 담당하기도 했었지만, 드라마/예능 쪽 프로그램에 장기간 협업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려낼 그림들이 흘러가는 평범한 소품이 아니라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단서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였다.
마음은 저 멀리 홀로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본 제작에 앞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드라마의 콘셉트 상 의식적이지 않은 거친 선으로 흑백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그림의 재료나 기법에 대한 조율이 필수적이었다. 수시로 JTBC 상암 사옥을 드나들며 수개월에 걸친 예비작업에 돌입했다.
어둡고 거친 선들을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드로잉 도구를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 고려되었던 연필과 콩테, 목탄 등은 결국에는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여행드로잉 분야에서 많이 사용하는 익숙한 피그먼트라이너도 펜 선이 너무 깔끔하게 나온다는 이유로 고사되어, 끝내 선택한 것은 펜똥(?)이 터프하게 팍팍 나오는 1.0mm짜리 평범한 볼펜이었다.
마침내 도구가 결정되고 겨울을 지나 아름다운 봄이 찾아왔지만, 마음은 계절처럼 여유롭지 못했다. 5월에 첫 방영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형사 유시현(이선빈 分)의 스케치북에 미리 그려져 있어야 하는 그림들에 대한 사전제작에 곧바로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둡고 거친 그림들이 스케치북 위에 한 장 두장 채워졌다. 그림이 영상에 결합된 형태의 최종 결과물은 티저영상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봄날을 마음껏 만끽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협업의 결과물에 마음은 충만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내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http://tv.jtbc.joins.com/ske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