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모 Apr 04. 2016

자연과 인간의 숲, 비자림

Drawing Blue #07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꽤나 먼길을 돌아왔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어릴 적 꿈꾸던 것과 지금의 모습이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막연하기만 했던 어릴 적 꿈은 '여행을 그림으로 담는 사람'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다.


여행 드로잉 작가라는 나의 직업이 좋다.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당당히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직업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느껴질 때가 언제냐고 묻는 다면,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취재를 위해 찾은 곳에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때라고 대답할 것 같다.

새천년 비자나무

매력적인 숲들을 찾아 헤매던 내 발걸음은 마침내 제주의 동쪽, 비자림에 닿았다.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 위치한 비자림은 500~800년 된 비자나무 약 2,800그루가 서식하고 있다. 최고 수령인 나무가 무려 900년에 육박한다고 하니 가히 천년의 숲이라 부를만하다.


붉은 송이로 이루어진 보행로 위에 키 큰 고목들이 만들어 놓은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짙은 녹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비자나무의 수형이 연출해내는 장엄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시선을 압도했다. 비현실적인 그 길을 걷고 있으니, 숲 속에 들어오기 전의 오늘이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자나무의 잎과 열매

비자림의 탄생에는 여러 가지 속설이 있지만, 한라산에서 자생하던 나무에서 씨앗이 떠내려와 지금의 구좌읍 일대에 뿌리를 내려 자연스럽게 숲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현재의 비자림을 천연림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자나무의 열매는 예로부터 구충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역민들로부터 철저히 보호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연간 10만 명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지로써 관리되고 있는데, 비자나무가 고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년 기생식물을 제거하고, 보행로를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닿아있는 현재의 비자림은 천연림과 인공림의 가운데에 서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숲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덕분에 이곳의 비자나무들은 고사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국내 최대의 군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은 자신을 보살펴준 인간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무성한 잎과 가지를 뻗어 여름의 햇살을 가려주었다. 나무의 배려 속에서 시원하고 편안숲길을 걷는 경험은 특별했다.


자연에서 태어나 인간이 가꾼 숲, 비자림.

내가 꿈꾸는 작가로서의 삶도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비자림을 닮길 바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비 내리는 안덕계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