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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Apr 07. 2016

그 겨울, 팽나무의 위로

Drawing Blue #08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로 가끔씩 악몽을 꾸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주위를 살펴보면 나는 어느새 깊고 좁고 어두운 우물갇혀 있었다. 축축한 돌벽 위로 아득하게 보이는 한 줄기 빛을 애타게 좇는 꿈. 그 빛을 향해 다가가고 싶지만, 발 디딜 곳 없는 우물 벽은 오르기에 너무나 미끄러웠다.


꿈은 철저히 현실을 반영하는 듯 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결정한 후, 내게 찾아오는 하루하루가 항상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불규칙한 수입은 생활에 안정감을 가져오지 못했고, 그와 더불어 자기 관리에 실패하면 언제든 일상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걱정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전과 비슷한 직업을 다시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불투명한 미래는 분명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퇴사를 함으로 인해 발생한 기회비용에 대해 따져보는 나를 발견하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동복리를 다시 찾게 되었다.

동복리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매콤 달콤하게 무쳐낸 회국 꽤나 알려져있다. 그 맛을 경험하기 위해 무더운 8월의 햇살을 뚫고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다시 찾은 이 동네의 골목이 낯설지 않았다.

계절이 두 번 바뀐 동복리는 겨울의 끝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1월의 눈송이들이 바닷바람 사이에서 방황하다 눈썹 위에 매달렸고, 아직 녹지 못한 눈들은 돌담 틈에 얼어붙어 있었다.


같은 동네가 계절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람 대신 바람이 가득한 겨울의 동복리는 고요했다. 비다의 소금기 바랜 녹슨 우체통만이 바람소리에 화답해 덜그럭 덜그럭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동복리에는 유난히 바람의 흔적이 많았다.

바람의 기나긴 여정의 일부가 길가에 심겨진 팽나무와 후박나무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팽나무와 바람

이렇듯 강한 바람이 맞닿은 곳은 고사해 버리고. 바람의 흐름에 따라 수형이 바뀐 나무들을 편형수라고 한다.

고요한 동복리를 하염없이 걷는 동안 사람 대신 여러 그루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백년을 다 살기 어려운 사람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을 지켜온 것들이었다.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도 나무는 꿋꿋이 자신의 새 가지를 움 틔운다. 그 애달픈 손짓은 오랜 세월 동안 꺾이고 부러지고 다시 돋아나길 반복한다. 고난을 버티며 의연하게 자라나는 그들이 눈물겨웠다. 겨울이라 잎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였지만, 바람의 흔적을 간직한 그 모습이 눈부셨다.


오래된 팽나무 곁에 바람을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바람에 흩어지는 흰 눈을 함께 바라보며, 내게 닥쳐오는 시련을 견뎌낼 작은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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