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wing Blue #12
아침까지 여름 비가 내렸다. 정오가 되어 멎어 들었지만, 숲 속은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로 온통 가득했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물러간 계절이라 습기가 불쾌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발끝에서 바스러지는 송이길이 촉촉히 젖은 녹색 잎들과 대비되어 더욱 붉게 느껴졌다.
이곳은 사려니숲길.
제주 비자림로의 봉개동에서 교래리의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총 길이 약 15km의 숲길이다. 사려니라는 단어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신성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사려니숲길은 '신성한 숲길', '신령스러운 숲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숲은 중산간 지대에 넓게 펼쳐져 있어 숲 속에서는 그 끝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주위의 수종이 바뀌면서 숲의 인상도 조금씩 달라졌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시대의 제주를 걷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일구기 전의 제주는 온통 돌과 나무로 뒤덮인 거대한 숲이었을 테니 말이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한낮의 햇살이 숲 속을 점령하고 있던 안개를 모두 밀어내 버렸다. 끝나가는 여름이 아쉬운 8월 하순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숲길 곳곳에 박혔다.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패턴 위를 걷는 것은 무척이나 황홀한 경험이었다.
간밤에 내린 여름 비는 평소에 말라있던 천미천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었고, 숲길에 작게 맺힌 물 웅덩이는 제주의 파란 하늘과 구름을 담아 보여주었다. 눈부시게 투명한 사려니숲을 만날 수 있어서 감격스러웠다.
단지 아름다운 자연의 한 가운데를 걷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을 위해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 길을 걷는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얻어 가는 것 같아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세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사려니숲길을 걷는 동안 줄곧 숲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숲이 가진 푸른 생명력, 투명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상에 지친 이들을 말없이 품어주는 숲의 너그러움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