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모 May 06. 2016

기적적이지 않은 도서관

Drawing Blue #11

미칠 듯이 그림이 안 그려지는 때가 있다. 붓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수없이 자신을 괴롭히다 결국 며칠째 시작조차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꼭 제주에 와야 했다. 제주의 해변과 오름을 걷다 보면 그리고 싶은 것들이 불쑥불쑥 떠올랐고, 그림 그릴 용기가 솟아났다. 아마도 이 섬에는 창작혼을 깨우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제주도는 건축가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걸까. 제주의 자연 위에 조화롭게 지어진 건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붙든다. 요즘에는 건축 기행으로 제주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타미 준과 안도 다다오의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각각의 건축물들은 설계자의 철학이 잘 반영된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왠지 모를 마음 속의 불편함이 존재했다. 대가들의 작품은 관광명소나 리조트 근처에 지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제주도민들의 평범한 일상 괴리되어 마치 제주안의 또 다른 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에 여행자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주민들의 삶터 따뜻한 건축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지면을 할애해 기꺼이 소개하고픈 그는 바로 건축가 '정기용'이다.

내가 맨 처음 정기용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말하는 건축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였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그가 건축을 통해 주민들과 공감하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국내 여러 지역에 공공건물을 설계했는데, 모든 공공건물의 건축과 운영방식은 오로지 공공의 이을 수행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규모나 외관을 치장하는 것을 경쟁하는 데 있지 않다고 보았다.


정기용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제주를 비롯하여 순천, 정읍 등 전국에 어린이들을 위한  공공도서관을 설계하였다. 부유한 집의 아이들이건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건 차별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책을 접하고 읽게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원칙이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에는 그가 설계한 도서관이 각각 하나씩 세워져 다. 제주를 여행하며 나는 그가 남긴 도서관이 무척 금해졌다.


제주 기적의 도서관


제주시 이도2동에 지어진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2004년에 개관하였다. 정기용은 건립될 도서관이 주변 환경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택들의 풍경과 조화롭게 공존하길 원했다. 어린이를 위한 시설이라고 하지만, 덩치 큰 도서관이 들어서면서 조용한 동네가 한순간에 큰 변화를 겪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건물의 높이를 가급적이면 낮게 설계하되, 여러 개의 분절된 공간을 만들어 각 영역의 독립성을 높였다.



지붕에 경사면이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제주에 폭우가 내리면 이 경사를 따라 물길이 만들어진다. 흘러내린 빗물은 입구 왼편에 마련된 수조로 쏟아져 내리도록 고안하였다.

제주의 자연을 참으로 소박하게 재현해 놓았다. 이 도서관과 함께 자라난 아이는 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도서관의 폭포 소리를 추억할 것이다.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


서귀포시에 지어질 도서관 자리에는 소나무 열댓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정기용은 이렇게 말했다.

소나무를 베지 않고 설계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무를 베지 않고 어떻게 건물을 짓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터전을 닦는 작업이지만, 정기용은 건축을 위해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건축은 늘 나무를 필요로 하지만, 나무는 건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에서 자연의 훼손을 경계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을 타원형으로 설계했다. 소나무가 있던 공간은 건물의 한 가운데에 중정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귀포의 어린이들은 도서관 어디에 있더라도 중정의 소나무를 보며 책을 읽을 수 게 되었,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 도서관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이 소나무 숲이었다는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정은 아름다운 정원의 역할뿐만 아니라 공간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소나무와 푸른 하늘이 함께 보이는 중정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종이에 이곳의 풍경을 천천옮겨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니 이곳은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옥외 도서관으로도 적합했다.



기적의 도서관은 전혀 기적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건축물을 통해 주민들과 공감하고자 했던 설계자의 소망과 시공한 이들의 성실함이 만든 열정과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차별이 없 도서관에서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정기용 선생이 바란 도서관의 기적이 아닐까 싶다.


정기용 선생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따뜻한 공간은 내 마음속에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록담을 만나러 가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