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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Apr 30. 2016

백록담을 만나러 가는 날

Drawing Blue #10


산보다 바다를 좋아한다.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을, 내리막길보다는 평지를 좋아한다. 사람 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런 내가  몇 시간째 한라산 백록담을 향해 걷고 있다니!


예전에 백두산 천지에 오른 적이 있다. 천지에서는 쾌청한 날이 1년에 30여 일 안팎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다행히 행운이 따랐다. 맑고 깊은 하늘과 수면 위에 그 하늘을 그대로 품은 천지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정상을 밟는 것에 대한 열의가 없는 편이었지만, 백두산 등정 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한라산 백록담에 다녀와야겠다는 것. 등산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활동이지만, 이곳만큼은 가까이에서 느껴보고 싶어 졌다. 백록담의 날씨도 변화무쌍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 표정이 바뀐다지만 어쩐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날씨는 내게 관대할 것만 같았다.


막연하기만 하던 그 약속을 백두산을 다녀온 후 6년 만에 지키게 되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바로 전인 6월 중순이었다.


한라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동쪽 사면을 오르는 성판악 코스를 선택했다. 성판악에서의 출발 시각은 오전 7시. 성판악 코스의 경우 백록담까지는 편도 4시간 반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서둘러 출발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하절기에는 12시 30분, 동절기에는 12시에 입산이 통제되므로, 너무 여유를 부리다 보면 산 중턱에서 돌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고도가 높아지자 낮은 기압으로 빵빵해진 과자 봉지


이번에는 날씨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만 같이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에 조바심이 났다. 하산을 고려해 충분히 이른 시각에 출발했지만, 발걸음엔 초조함이 묻어났다. 코스의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완만한 돌길이 이어져 무난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숨이 차올랐다. 점점 가팔라지는 계단 때문에 걷다가 멈춰 숨을 고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늘 위의 또 다른 바다


구상나무 군락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산허리에 끼어있던 구름이 다행히 정상을 덮지는 못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고 말았다. 산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하늘에 눈이 시렸고, 그 아래에 또 다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구름의 바다. 두 다리의 피로감이 봄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제주에서 가장 높은 분화구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6월의 백록담


분화구의 규모는 생각한 것보다 더 거대했다. 이 섬에 있었던 가장 성스러운 분화의 흔적 앞에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감격스럽도록 맑고 장대한 풍경 앞에서 도저히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의 가장 높은 곳에서의 드로잉


Tip. 정상까지 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성판안 코스의 중간지점에 있는 사라오름 오르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사라오름은 백록담을 제외하고 제주에서 가장 높은 산정호수로 유명한데, 큰 비가 내린 뒤에 이곳을 찾는다면 맑은 물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비온 뒤의 사라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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