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차바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본 뉴스 꼭지로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섬을 미리 떠날 수도 있었다. 어떤 낙관이 있어 꾸물거렸던걸까. 결국 비행기가 결항되며 발이 묶였다.평소엔 잘 가지않는 제주시 탑동 소재의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낡은 호텔 창문 밖으로강해지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문득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태풍을 앞두자 아이러니하게도 거리는 잠잠해졌다. 사람과 차량이 북적이던 공간은 다가올 거대한 손님을 공손히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그 거리는 단단히 당겨긴 활 시위처럼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다급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쉽게 잠들기 어려운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차바는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제주는 그의 긴 여정 중에 만난 하나의 섬에 불과했다. 짧지만 강렬한 만남. 차바는 제주의 곳곳을 할퀴고 지나갔다.
무심히 섬을 휘젖고 다니는 이 태풍은 내일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곳을 떠나겠지. 지난 13개월동안의 내 여행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조건 최우선이 되는 여행. 섬에 있는 모든 것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다소 요란스러운 여행.
하릴없이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작은 탁자 위에 시선이 멈추었다.마음을 진정시키기위한 수단으로 종종 드로잉을 하기도 하는데, 오래되고 저렴한 숙소에는 다행히 그럴싸한 도구가 머리맡에 준비되어 있었다. 각진 모양의 테이블 램프에 불을 켜고, 소란스러운 이 밤을 천천히 기록했다.
머물렀다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버티며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사랑스러운 이 섬을 그저 요란하게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이 아닌,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유난히 소란스럽던 그날 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묵직한 고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