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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말 Sep 12. 2020

오늘의 음악 '귀뚜라미'

어느 라디오PD의 지극히 개인적인 선곡 

영어 라디오 채널에서 일할 때이다. 

'미국 사람만큼이나 영어가 편하지만, 한국말도 찰떡같이 하는' 여성듀오 애즈원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다. 당시 주옥같은 우리 가요의 명곡들을 영어채널에서도 많이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가사의 대략적인 내용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코너를 했었다. 사실 우리 가요의 명곡들은 멜로디가 좋기도 하거니와, 한줄한줄 가슴을 울리는 가사를 빼놓고는 그 진가를 전달하기가 아쉽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하지만 원어민도 아닌 PD와, 원어민이지만 한국말에 여전히 어려움이 있는 교포작가가 머리를 맞대고 이 가사들을 영어로 옮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늘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곤 했다. 

한 예로 김연우의 <이별택시> 가사를 보자. 

                                              


건너편에 니가 서두르게 / 택시를 잡고 있어 

익숙한 니 동네 / 외치고 있는 너 빨리 가고 싶니 
우리 헤어진 날에 / 집으로 향하는 너 
바라보는 것이 마지막이야 
내가 먼저 떠난다 / 택시 뒤창을 적신 빗물 사이로
널 봐야만 한다 마지막이라서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달리면 어디가 나오죠
빗속을

와이퍼는 뽀드득 신경질 내는데 
이별하지 말란 건지 / 청승 좀 떨지 말란 핀잔인 건지 
술이 달아오른다 버릇이 된 전화를 /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내 몸이 기운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귀찮을 텐데 달리면 사람을 잊나요
빗속을

지금 내려버리면 갈길이 멀겠죠 아득히 
달리면 아무도 모를 거야 우는지 미친 사람인지

비가 쏟아지는 날, 이별을 하고 



언어의 연금술사 윤종신이 작사한 이 노래의 가사는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택시 뒷좌석에 타고 빗속을 달려가는 남자의 처연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상황이지만, 심리상태가 아니라 상황을 담담하게 그리면서 오히려 안타까움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가사인데, 문제는 후렴구였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달리면 어디가 나오죠

빗속을


작가가 가져온 영어 번역을 보니까 전혀 다른 문장으로 번역이 되어 있어 적잖이 당황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가사는 문법적으로 보자면 단어 순서가 도치되어 있고 주어도 없어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교포가 해석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내용이었다. 적절히 생략된, 단어의 순서가 뒤바뀐 "기가 막히게 잘 쓴 이 말맛"을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웬만큼 노련한 번역가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또 한 번 나를 좌절시킨 가사가 있었으니 바로 안치환의 '귀뚜라미'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소리는 아직 노래가 아니오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


우~ 귀뚜루루루.. 귀뚜루루.. 귀뚜루루.. 귀뚜루루..
보내는 내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 위로 실려 갈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소리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소.

우~ 귀뚜루루..귀뚜루루..귀뚜루루..귀뚜루루.뚜루루
보내는 내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 위로 실려 갈 수 있을까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 위로 실려 갈 수 있을까
우...귀뚜루루..귀뚜루루..귀뚜루루..귀뚜루루.뚜루루



바로 오늘 같은 이맘때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 늘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그래서 이맘때면 라디오에서 많이 흘러나오는 곡. 어느 계절보다 하늘이 높고 청명한 한국의 아름다운 가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안치환의 시원하고도 정직한 목소리, 서정적인 가사. 어찌 이런 최고의 곡을 영어로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역시, 귀뚜라미라는 곤충 자체가 가지는 의미부터가 장애물이었다. 귀뚜루루루, 라는 발음에서 느껴지는 가을의 호젓함과 외로움. 사람 '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왠지 귀뚜라미 귀뚜루루..라는 단어를 들으면 조용한 적막 가운데 두 귀를 기울여 작은 소리를 듣는 듯한 우리말의 세심한 느낌을 우리의 짧은 번역 실력으로는 당최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귀뚜라미는 보통 귀뚜라미가 아니다. 시인의 귀뚜라미다. 시인 나희덕이 쓴 시의 주인공 뒤뚜라미인 것이다. 



 


그때는 우리의 짧은 번역 실력으로 포기했지만, 그리고 지금은 영어 라디오에서 더 이상 일하고 있지도 않지만 우리 가요의 아름다운 가사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알리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가사와 내용을 함께 알고 들으면 우리 가요의 명곡들에 빠질 사람들이 세계에 얼마나 많겠는가. 
장마와 폭염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9월 밤의 서늘함은 오늘 안치환의 아름다운 곡  '귀뚜라미'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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