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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말 Oct 04. 2021

문득 어린날의 골목길이 떠오를때- 정원영 <강남어린이>

선뜻 그 골목길로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참으로 우연하게도, 내가 다섯살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살았던 그 동네, 그 근처로 35년이 지난 지난해 이사를 올 줄은 몰랐다. 아홉살 때까지 그 골목에서 살았으니까, 정말 삼십 오 년이었다. 가보려면 언제든 가볼 수 있었지만 선뜻 발길이 닿지 않았다. 그 앞으로 지나다니면서 "저 골목 안으로 주욱 올라가면 내가 살던 오르막길이 나와." 하고 말하면서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왠지 그 날은 그 골목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파출소와 학원, 빵집, 문방구.. 나즈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오래된 동네의 입구에 다다르자 시간이 삼십 오 년 전으로 건너 뛴 것 같았다. 기억보다 너무 좁은 골목길, 세월에 따라서 함께 낡아버린 목욕탕 간판이 눈에 들어오며 가슴이 뛰었다. 단층짜리 주택들은 이미 오래전에 삼사층짜리 빌라로 바뀐 듯 했다. 빌라들도 이미 세워진 지 오래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집들은 부서지고 새로 지어져도, 오래된 주택가의 길은 쉽게 메우고 짓기 어려워, 길은 내 기억대로 굽이 굽이 이어졌다. 아이들과 뛰어놀던 골목길은 지금 보니 어른 한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아주 좁은 길이었다. 때로는 축구장이 되고 때로는 놀이터가 되던 흙바닥 공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오래된 교회만이 이 곳이 그 때와 같은 곳임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고 있었다. 어릴 때 살던 동네를 가보면 누구나 아련한 마음에 젖어 든다. 가기 전에는 눈물이 나올 까봐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슬픈 마음과 우스운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하루가 지지리도 지루하고 길다가도, 어느 날은 언제 해가 졌나 싶도록 짧기만 하던 어린 날의 나날들. 


그날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기억의 저아래 묻혀 있던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강남 어린이>.


나 어릴 적에 뛰어놀던 곳

바람 지나간 뒤에 낯선 모습만

내가 품었던 어린 날의 꿈

바람 따라 떠나고 나만 외로이

엄마손을 흔들며 걸어가던 길

개울 건너 들리던 아이들 노래

무성했던 언덕엔 높은 건물들

네온 불빛 사이로 퍼져 버린 꿈

돌아가리라 푸른 하늘 건너

옛 친구들 어울려 노래하는 곳





이 노래를 내가 처음 접한 건, 정원영 2집 앨범 'Mr. Moonlight'에서였다. 1995년에 나온 이 앨범에서 <강남 어린이>는 김장훈이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김장훈의 화려한 콘서트나 발차기로 그를 기억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김장훈은 나즈막이, 기교없이 읖조리는 목소리가 더없이 호소력있는 사람이다. 작사, 작곡 모두 정원영이 한 이 노래에서 가사의 의미를 더없이 잘 살린 것이 바로 김장훈의 노래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키보드와 말하는듯한 기타소리가 흐르고, 몽환적인 코러스가 함께 등장하며 꿈꾸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돌아가리라 푸른 하늘 건너/ 옛 친구들 어울려 노래하는 곳" 후렴이 반복되면서, 포크락의 낭만적인 결말 속에 아름다운 과거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준다. 정원영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세련된 화음이 너무나 잘 드러난 노래다. 어떻게 해서 이 곡의 보컬에 김장훈을 기용했는지 매우 궁금한데, 옛날 뉴스를 찾아봐도 자료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이 버전이 원곡이 아니라는 걸 안 것은 나중이었는데, 이보다 3년 먼저인 1992년 발매된 장필순의 3집 '이 도시는 언제나 외로워' 에 실렸었다. 정원영 작사, 작곡이므로 자신이 장필순에게 주었던 곡을 후에 자신의 앨범에 다른 보컬로 부르게 해서 실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필순의 이 앨범에는 '가난한 그대 가슴에' '제비꽃' 등 히트곡이 많아서 <강남 어린이>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원영 버전과 많이 다르진 않지만, 정원영 버전에서 결말에 강한 리듬이 나오면서 시원하게 터뜨리는 것과는 다르게, 장필순은 끝까지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코러스도 지나치지 않게, 장필순의 목소리가 단아하게 부각되는 듯한 느낌을 주어 두 버전은 사뭇 맛이 다르다. 두 가지 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게 좋다. 


아무래도 작사에는 정원영 자신의 어린시절의 경험이 녹아있는 듯 한데 정확한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강남이 상전벽해 되어 논밭이 도심으로 변한 이야기는 서울토박이 출신의 중장년층에게서 많이 들어볼 수 있는 추억담이다. 비단 강남 뿐이랴. 이제 서울은 어느 곳이고 변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옛 친구들 노래하던 곳은 이젠 장소만 없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사람도, 마냥 살아가는 일이 재미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던 어린이의 세상이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돈으로, 시간으로, 여흥으로, 관계들로써 어린이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어른들은 애타게 찾아 헤매지만 결코 다시는 그 나날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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