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Love has gone>
더이상 밤에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잠이 오고, 새벽녘에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게 되는 9월이 되면 나도 모르게 이 노래들을 떠올린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September, 그린데이(Greenday)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또는 양희은(아이유)의 가을아침,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8월 말부터 이미 성질급한 청취자들은 이 노래들을 신청하기 시작한다.
- 휴, 아직 가을 되려면 멀었는데 벌써부터 틀어버리면 도대체 몇번이나 틀어야 되는거야...
이제는 더이상 라디오 피디로 일하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20년 넘게 이어온 습관이 무섭다고, 이 맘 때 이 노래를 틀지 못하면 시기를 놓쳐 버릴까봐 조급한 마음이 든다.
이주영의 <집에 가는 버스>라는 노래가 있다.
비가 오면 봄꽃 다 진다며 우리
참 아쉬워했었는데
오늘 아침엔 봄비라기에는 조금 거친 비가 내렸는데 말야
새로 피어나는 나뭇잎이 더 푸른 거 있지
비가 오면 꽃이 지고
꽃이 지면 잎이 피어나네
참 아름다운 노래인데, 이 노래를 틀 수 있는 날이 일년에 몇일이나 될까? 흥청거리는 봄꽃놀이 시즌이 살짝 지나고, 5월 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촉촉한 봄비가 내린 오후, 아마도 벚꽃은 이미 지고 그 자리에 대신 연푸른 잎사귀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무렵. 고작 일 년 중 일주일이나 채 될까 싶은, 때마침 비가 내린 그 날이 이 노래를 틀 수 있는 적정한 날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이제는 생업도 아니지만, 9월이 시작되자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September 를 플레이한다. 이 곡의 제목은 9월이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9월 감성과는 좀 안어울린다. September는 신나고 리드미컬한데 오히려 9월에는 같은 그룹의 After the love has gone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한동안 이 음악을 리플레이해서 귀에 넣고 다녔다.
오랜만에 가사를 보니, 이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yesterday was all we had."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제 뿐. "
가진 것이 '추억' 뿐인 사람들은 슬프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옛날 얘기를 부쩍 많이 하게 된다. 지나간 일이 소중하고, 아름답고, 그런 추억만으로 오늘을 버티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삶이라면 조금 슬프니까.
지난주, 로버트 레드포드가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신 엄마는 음악을 잘 몰랐지만, 제일 좋아하는 팝송이 The way we were 였다.
- 이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이러면서 아빠는 전자올갠으로 이 노래를 연주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팝송이 있었다니. 취미 부자였던 아빠와 달리, 별다른 취미도 없고, 음악도 잘 몰랐고, 그저 열심히 사는 것 밖에는 몰랐던 엄마가 좋아하는 팝송이 이 노래였다니.
이 노래는 영화 <추억>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이 영화(원제 The way we were, 73년 작)를 주말에 TV에서 해주던 시절에, 엄마랑 같이 봤었다. 엄마는 젊었을 때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봤었다며 TV 앞에 앉았다. 한때 엄청 사랑했던 남녀인데 사회, 정치적인 광풍(매카시) 속에 서로 신념과 갈 길이 다른 두 사람은 세월의 흐름 속에 헤어진다는 통속적인 줄거리. 그래도 시드니 폴락의 드라마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배우들의 연기, 주제가상을 탄 노래 The way we were가 어울려, 멜로드라마의 정석, 추억이 없는 사람조차 왠지 추억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이 됐다.
아무리 봐도 로버트 레드포드는 세기를 장식하는 대표 미남이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전통적인 미녀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난 배우인데, 그 당시에는 좋은 말로다가 '개성파 배우'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를 썼었더랬다. 멜로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으로는 여자가 좀 안 어울린다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당당한 연기에 바로 몰입해 버렸던 기억. 아마도 중학생 때 였던 것 같은데, 끝까지 해피 엔딩이라는 선물을 주지 않고, 중년이 된 두 주인공 남녀가 그저 웃는 얼굴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의 결말이 너무나 야속했었지.
이 영화가 왜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있는지 생각해 봤다.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와 좋아하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것 같다. <벤허> 말고도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었다. 그것이 나를 조금은 행복하게 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잘 기르기 위해 삶을 갈아넣어 돈을 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각자 개인의 행복을 느끼는 모습, 즐거워 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워졌던 것 같다.
The way we were 역시 '추억'에 대한 노래다. 헤어졌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겠다는 마음. 지금은 아빠도 엄마도 곁에 계시지 않지만, 같이 본 영화와 음악을 떠올린다.
가진 것이 '추억 뿐인' 사람은 슬프다지만, 그래도 꺼내어 볼 추억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