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친다.
니체는 1889년 광장에서 마부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말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다 쓰러진 뒤 완전히 미쳐버리고, 1년 후 죽는다.
개발과 관련된 책만 읽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본가에 들러 가져온 책 하나가 <살고 싶다는 농담>이었다.
허지웅의 항암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러 이야기를 엮어놓은 책이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 살아가면서 느꼈던 것들을 담담히 풀어나가는 게 읽기 편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느니, 당신은 할 수 있다와 같은 뻔한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자기계발서 처럼 읽고 나서 자괴감과 함께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안 들고,
개발 서적을 읽을 때처럼, '이 책에 나오는 말을 조언으로 삼겠어'하며 형광펜을 그으면서 읽지도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내 성격상 이 책도 형광펜을 치면서 읽었을 텐데, 아무런 부담과 기대 없이 읽자고 다짐해서인지 술술 읽혔다.
'살아라'라는 말로 끝나지만, 이 책은 단순히 '그래 일단 살아'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내 삶에 항상 있는 '불행'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음의 말이 인상 깊었다.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그래 불행 역시 내 삶의 일부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온전히 내 몫이다.
나에게 불합리, 부조리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했나..라고 생각해보니
책에 나온 대로 나는 피해자야!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그 '불행'을 대처했던 나를 생각해보면 꽤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이게 내가 잘나서, 정신적으로 튼튼해서 그럴 수 있었던 건 절대 아니고, 그때는 운이 좋았다.
걱정인 건 다시 한번 그런 불행이 닥쳤을 때, 나만 피해자 같고 남 탓만 하고 싶을 때, 평정심이 흐트러졌을 때, 내가 쓴 글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불행을 이어갈지 그만할지는 온전히 너에게 달렸다.
하지만 네가 그 불행을 이겨내기 위해 그 불행을 '견뎌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걸 혼자 견뎌낸다고 해서 튼튼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힘들 땐 위 말이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글의 제목인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은 니체의 사상을 일축한 말인 것 같이 느껴졌다.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고 나아가 그런 삶을 사랑하는 것.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것.
사실 나는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되풀이할 생각은 없지만,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으라는 메시지가 좋았다.
불행이 온다면 ㅇㅋ그래 함 와봐 라는 간생간사 자세로 살아가야지..
생각할 거리도 많이 주는 책이었다.
'삶을 일곱 가지 장면으로 요약하라고 했을 때 나라면 무얼 골랐을까'
그래 내 인생도 하나의 영화였지!
내 인생에도 바닥과 하이라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그래 내 인생을 일곱 가지 장면으로 요약하자면.. 하고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허지웅이 하고 있다는 '아쉬탕가'요가에 관심이 갔다.
전투 요가라니! 기회가 된다면 해봐야지.
주말에 이렇게 카페에 나와 음악소리, 사람 소리와 함께 책을 읽는다는 건 꽤나 좋은 것 같다.
'오늘은 어떤 걸 공부해볼까'가 아닌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를 고민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이렇게 글을 쓰며 복기하는 것도..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