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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나 Jul 04. 2020

부러움의 다른 이름, 비꼬기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주의: 사실관계를 그대로 옮기다 보니 다소 비속어가 섞여, 아니 정확히는 난무합니다.


몇 달 전 아내의 생일선물을 골라야 한다며 조언을 구하는 친구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뭐 여느 해와 다른 점은 없었다. 친구의 아내도 나와 꽤 친한 동생이었고, 남편과 친구는 친한 선후배 사이라 늘 나를 여자 형제쯤으로 사용하는 것쯤이야 기꺼이 받아줄 문제였다. 남자들이 여자 선물을 고르는 것이 꽤나 고민일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 조언을 해주는 것쯤이야.  No problem. 그러다 보니, 지난 12년 동안 7-8번은 같이 골라주거나 조금 더 싸게 구매하는 방법 등을 일러주곤 했다.

해마다 있는 일이었음에도 올해는 뭐가 문제였는지 사실 지금도 잘은 모르겠다. 친구는 아내와의 사이에 긴장 기류가 높아지거나 싸움이 커지거나 아내에게 소홀할수록 선물의 가격도 비례하여 치솟았다.

조언을 구하는 선물의 폭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350만 원인 신상 가방과, 500만 원 정도의 코트, 1000만 원이 다 되는 시계. 이렇게 세 가지를 고르곤 나에게 뭐가 좋을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일단, 세 가지가 비슷한 가격이 아닌데 선택이 가능하냐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조금씩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짜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살기 편한가 보다? 해마다 선물 규모가 어마어마해지네. 맨날 둘이 싸우고 서로 나한테 사네마네 전화 불나게 하면서 선물하는 것 보면 조온나 사랑하나 봐.라는 비꼬는 말까지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체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이 친구는 아내가 꽤나 규모 있는 병원을 하고 있고 처가가 상당한 재력이 있는 집안이다. 본인이야 그 수준에 맞추려는 노력일 수도 있으나, 왜 그렇게 그날만큼은 무슨 얘기를 해도 싸우려고 덤비는 싸움닭이었는지 알 수 없다.

너도 좀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연애도 하고 아직 봐줄만할 때 재혼해서 편하게 살라는 말엔 거의 폭주를 했다. 아.. 그놈의 남자 타령.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뇌와 입이 각성이라도 한 것 마냥, 상처될 만한 말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팔자 좋게 산다고 누구나 돈 많은 사람 만나서 살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설사 내가 그런 결혼을 한다한들 나는 남자한테 빨대 꽂아 살 생각 없다.
나는 친구의 자존심을 아주 의도적으로 건드렸고,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 뒤부턴 시궁창 유치원생들 싸움. 대략 이러하다.

“니 손목에 찬 시계는 뭐냐. 너도 할 것 다하면서 가식적이다.”

“씨발 가짜다.” (이때부터 싸움은 거의 초등학생 수준으로 가고 있다)

“뻥치지 마라 형이 사준 거 다 안다.”

“씨발 마누라가 주말도 없이 일해서 시댁 빚 갚고 차 사드리고 고생했다고 사준 거다. 난 환불하라고 했는데 오빠가 버틴 거다.” (유치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래도 결국은 너도 좋았으니 니 손목에 있는 거 아니냐.”

“씨발 사이 존나 안 좋으면서 선물로 때우는 너랑 고생한 마누라한테 십 년간 용돈 모아 사주는 거랑 같냐. 요즘 나 힘든 거 아는 놈이 선물 골라달라고 하냐. 염장을 질러라 아주. 나는 위험하다는데도 아직 자동차 타이어도 못 갈고 있다.”
(두둥. 병신 인증.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직도 후회되는 병신 파트)

“야. 그렇게 힘들면 말하지 그랬어. 내가 갈아주면 되는데.” (이 파트에서 자존심 지근지근. 그래 네가 이겼다)

한참을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설마 돈이 없어서 타이어를 못 갈고 있단 뜻이겠냐? 친구라는 놈이 그 속도 모르고. 우린 서로한테 조금도 도움이 되는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초등학생도 아닌 유치원생들 같은 싸움으로 25년의 인연을 끊었다. 단짝이었고 남편이 예뻐했던 친구는 그렇게 남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이 가끔 난다. 눈치 없이 말을 쏟아내 늘 짜증이 났던 친구를 잘라낸 건 후회하지 않지만, 그 날 쏟아냈던 말들은 한 없이 부끄럽다. 시간이 지나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없고 이 놈은 다 가진 것 같았다. 아주 단순한 논리다. 사네마네 하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며 선물을 고를 아내와, 액수의 범위가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 선물을 고르는 재력과, 나는 20대에 수험에 실패했던 직장과, 모든 얘기를 고민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성격까지. 내가 이 친구보다 더 가진 것 하나는 화목한 가정 딱 그거 하나였는데 더 이상 내세울 게 없는 것 같았다. 인생의 가장 자존감 바닥이었던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아 한없이 창피하고 부끄럽다.


<여기까지가 1년 전 쓴 글인데 말이죠. 물론 화해하고 지금도 친구입니다. 문득 지나고 보니, 그냥 단순히 저 새끼가 부러웠던 거죠.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부러움을 느낄 때 자신을 방어하는 기제가 바로 비꼬기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이야 얼마나 벌면 선물을 그런 걸 사주냐? 이 새끼 존나 부럽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발전입니다. 부러운 건 비꼬지 말고 부럽다고 말하자고요?! 전 요즘 하루를 열 일하고 밤에 사람들과 한잔 할 수 있는 허락된 여유가 가장 부럽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부럽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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