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지나 Jul 06. 2020

연약함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쓰레기통을 자주 비우는 깨끗한 습관


오랜 친구와 톡을 하다 지난 연애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남자 쪽이 양다리를 끼지 않는 한, 나는 헤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고, 말싸움에서 져주고, 메뉴 선택에 양보하고, 실수할 만큼 마시지 않고, 억울해도 먼저 사과하는 것이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눈에 콩깍지가 벗겨질 쯤이 한참 지나서도 나는 정말 ‘무식하게’ 한결같았다. 오히려 처음보다 애정표현을 더하고, 더 참고 더 이해하고 내가 불편한 것들은 더 감수하며 스스로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조금은 으쓱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한결같은 것이 관계의 핵심이라고 믿었던 내 생각에 반기라도 들 듯, 어느 순간 관계는 차분해지고 어느 시점이 지나면 차분하다 못해 지루해져 상대는 한 눈을 팔고 때가 되면 용서를 빌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거짓말처럼 나의 연애 3번의 패턴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달라지면, 나는 더 이상 한결같음에 쏟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불만과 실망을 쌓아 어는 순간 관계의 실을 냉정하게 끊어버려 늘 상대가 한눈을 팔았던 시기와 내가 이별을 고하는 시기 간에 시간차가 있다 보니 상대는 대부분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에 어이없어하거나 헤어지는 순간 독한 계집애라고 분노를 퍼부었다.

지나고 보면, 아마도 그때의 나는 상대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결같음을 내 모습의 스페셜티인 것처럼 꽤나 자랑스러워했던 것도 같다. 늘 ‘한결같은’ 나는 처음과는 사뭇 달라지는 상대에게 실망을 하거나 심지어 분노를 쌓기까지 하면서도 나의 ‘한결같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하지 않은 채, 나만의 쓰레기봉투를 만들어 꾹꾹 눌러 담고 담아 한번에 터트려버리곤, 늘 나는 최선을 다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며 살았다. 한결같지 못한 네가 악당.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했던 네가 악당.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네가 사랑이 부족한 쪽. 그리고 나는 피해자이며 인내한 자.


우는 걸 잘 못하는데 유독 붙들고 잘 울게 되는 상대가 있더라. 일종의 어리광인것 같다


내 쓰레기봉투 용량이 좀 컸던 게 유일한 장점이었지만 쌓고 쌓아 억지로 묶었을 때는 결국 찌져지고 터지는데 시간만 몇 년이 걸렸을 뿐, 용량이 큰 만큼 쏟아진 쓰레기는 수습을 할 수도 없었다. 헤어짐의 이유를 묻는 상대에게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할 만 큼 했다. 끝. 무엇을 할 만큼 했다는 것인가? 무엇을 그만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 주어는 연인과의 사랑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하는 이해와 인내와 배려였다. 그렇다고 믿었다. 다시는 같은 이유로 쓰레기를 만들지 않도록 서로가 노력할 수 있는 기회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 한번 주지 않은 채 그렇게. 어쩌면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나의 연약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쓰레기봉투에 쓰레기를 쌓는 일이 거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관계에 있어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논쟁을 피하기 위해 무조건 저주는 일등은 결코 배려도 이해도 아닌, 그냥 보류라는 것을. 가끔은 이해라는 말의 다른 뜻은 포기라는 것을. 완전히 없는 것으로 비워내지 않으면 이해와 인내라는 이름의 봉투에 담긴, 질투, 실망 분노 등의 쓰레기는 그 안에서 썩고 냄새가 나 결국은 비울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떤 단계를 거치고 있든, 연인에게 안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안도감은, 우리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신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관계가 성장하려면 연약함이 필요하다.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노력은 어떤 면으로는 우리를 강하게 하지만, 동시에 많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서로의 신뢰가 강해질 때 우리의 연약한 면에서 서로의 안전한 공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연약함은 연인에게만 보여주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것이므로. 연인이 나의 유일한 피난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감정을 다 들어낸다는 것은 안도감인듯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paichaiuniv/150153189343
https://m.blog.naver.com/zeena0518

매거진의 이전글 부러움의 다른 이름, 비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