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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나 Sep 17. 2020

관계에도 사용설명서 학습이 필요하다.

Fake it till become it.

fake it till you become it.
될 때까지 그런 척 해라.

언젠가 테드 강연을 보고 뇌리에 박혀 인생의 모토처럼 삼았던 말이다. 말과 행동의 세뇌 효과를 신봉하는 나는 ‘척’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지 않은 척, 다 해낼 수 있는 척, 별것 아닌 척하다 보면 힘들지 않고, 언젠가 해내게 되고, 별것 아니게 되는 것. 나는 그런 ‘척’의 효과를 믿는다. 그래서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해낼 자신이 없을 땐 될 때까지 ‘척’을 한다. ‘척’을 함으로써, 나에게 적응할 시간, 구력이 쌓일 시간 그리고 상처 받지 않을 시간을 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척하기’는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시작했다. 내가 공감능력이 굉장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로 인해 남들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만들어온 습성이었다. 공감 능력은 극히 부족하지만, 사람들에게 함부로 상처가 되는 말이나 화를 내며 생기는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소심한 나는 되도록이면 공감하는 ‘척’ 하는 말이나 제스처를 보이는 것에 제법 신경을 썼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서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 예를 들면 술만 마시면 소위 ‘개’가 되는 습관이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 너무 심하게 감정노동을 쏟는 모습, 화를 이기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던지거나 관계에서 쉽게 상처 받는 친구들을 보면 공감하며 동조하는 반응을 보일 수는 없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무딘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적어도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공감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이는 행동이나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지는 최소한의 본능으로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분명히 나는 무의식 중에 공감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친한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내 친구들은 대부분 굉장히 오래된 친구들이다. 아주 특이한 것은 모두 하나 같이 서로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서로 만나 알아가는 과정해선 공감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누구와 헤어지든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는 친구나, 매일 밥 먹는 것도 귀찮아할 만큼 무기력한 친구, 일상에 허점이 넘치거나 가진 것을 다 퍼주는 친구부터 아무도 믿지 않는 폐쇄적인 친구까지. 그 친구들에게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공감하는 ‘척’하는 행동과 말들을 하고 그것마저 자신이 없으면 말과 행동을 아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처음엔 가까워지는 게 힘들었다거다 정을 쉽게 주지 않는다거나 격하게 편들어주지 않아 서운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아마 우리는 서로 다른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해 꽤나 오랜 시간 노력을 했을 것이다.


정을 주지 않는 느낌이었다는 고백을 듣곤 한다.


물론 ‘척’하는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끝나거나 흐지부지 그냥 그런 관계로 이어진 사이라면 나를 무척 가식적인 사람이나 무관심한 사람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척’하기의 효과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타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언제부턴가 진심으로 공감하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눈물이 없는 내가 어느새 얘기를 들으며 가슴이 따끔거리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그런 성격과 그런 고민들이 더 이상 이해 못할 부분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너라는 사람이 나는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알게 해 주는구나. 나의 좁은 세계에선 알 수 없는 감정들과 경우들을 가르쳐주는구나. 그 시점부터의 공감은 더 이상 ‘척’하는 단계의 공감이 아니다.


공감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고 싶다.


가끔 페이스북에 뜨는 과거의 오늘 내가 쓴 글을 보면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아닌 듯 나인 듯, 알 수 없는 다른 내가 있었던 것 같이 낯선 내가 있다. 그때의 너는 지금처럼 힘들었니? 지금의 나처럼 공부만 하거나 일만 하는 사람이 부러웠겠지? 그리고 공부만 하는 누군가가 힘들다고 하는 것을 공감할 수 없었을 거야. 왜냐면 지금의 나도 과거의 네가 부럽거든. 다양한 일상을 사는 네가 몹시도 그립거든. 이렇듯 내 인생을 놓고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괴리감에 배신감마저 드는데 어찌 남에게 높은 공감대를 보여줄 수 있나.



페이스북에 뜨는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조차도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저 스케줄에도 아침조깅을 하는 미친년은 대체 누구냐



상대방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주는 대부분은 실상 자신이 공감능력이 높다고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 연대기로 펼쳐놓은 과거의 자신도 스스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거늘, 자신의 공감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본인의 공감대가 기준이라고 자만한다. 공감능력이 높고 측은지심이 많으며 누구보다도 많을 것을 겪었거나 감내하고 있다고 믿는 나머지 본인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면 상대가 이상하고 위약하다 결론짓는다. 네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내가 공감할 수 없으면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런 착각은 쉽사리 행동과 말로 옮겨져 상대가 처한 상황을 ‘힘들긴 하겠지만 적어도 자신보다는 쉬운 상황’으로 치부한다.

제발 함부로 자신의 공감능력이 높다거나 측은지심이 많다는 판단은 하지 마라.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을 공감한다는 것은 자만이다. 그 자만은 ‘알 것 같다’는 착각에서 만들어져 ‘알 것 같기 때문에’ 또는 ‘알기 때문에’ 나는 너처럼 하지 않아 또는 나는 너처럼 하진 않을 거야 라는 결론에 이르고 그 결론이 쉽게 표현된다. 사람 인생사 오조오억만 개가 넘는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데 어찌 같은 경험에 같은 느낌이 있을 수 있나.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다. 내가 아는 경험도 아니고 알 것 같은 경험도 아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학습하여야 한다. 물론 학습의 노력도 쏟을 필요가 없는 만국 공통의 쓰레기들이나 세 살 아이도 판단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을 벗어난 사람도 있겠다마는, 적어도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만큼은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은 사용매뉴얼을 익히듯 학습을 해서라도 같이 느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상대가 힘들어하는 포인트,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대가 쌓아온 성격.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상대가 싫어하는 것. 그것이 상대에게 중요한 부분이고 그 상대가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없을 땐 그냥 학습하고 익히면 된다. 그것도 힘들면 ‘척’이라도 한결같이 하던가. 그냥 척이 아니다.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척이 아니라 한결같은 척이란 말이다. 계속 학습하며 ‘척’하다보면 굳이 설명서를 찾아보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때가 있을테니. 적어도 공감한다는 착각으로 스스로에 면죄부를 주며 던지는 무딘 말들에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는 것보다는 오만배는 나으니.



- 늘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쓰다보면 결국은 나한테 하는 말로 흘러가게 된다. 제발 이해가 안되면 사용매뉴얼정도로 생각하자. 누가 매뉴얼을 다 이해하나. 그냥 익히는 거지.

임계점이 높다는 것은 어쩌면 솔직한 것에서 오는 분쟁과 마찰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피하는 비겁함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그냥 생긴대로 말랑말랑하게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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