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 따윈 없다

<D.P 개의 날>

by 글레디에디터

언제부터인가 예능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웃기지 않는다. 재미있지도 않다. 싸구려 힐링이 다 잡설처럼 느껴진다. 나영석을 만드는 예능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나영석은 맨날 여행과 욜로, 힐링만 주야장천 강조한다. 사실 나영석을 욕할 필요도 없다. 시대의 화두가 그렇고 그러니까 말이다. 팔리니까 만드는 것이다. 그나마 나영석이 만든 예능은 박탈감만 느낄 뿐 기만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예능은 '진짜 사나이'다. 연예인들이 군대에 가서 '군인'인 척한다. 군대를 미화한다. 그곳에 '진짜 사나이'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 60만 현역과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 감도 안 잡히는 '예비역'들이 보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수없는 비판이 가해져도 버젓하게 군대의 지원을 받아 꽤나 오랜 기간 우려먹은 예능이다.


'진짜 사나이'를 보면서 군대에 대한 추억과 낭만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군대 별것 없구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남성의 모든 문제가 군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군대는 소위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 안 되면 되게 하라, 안되면 될 때까지란 구호 아래 20대의 혈기왕성한 젊은 청춘들의 몸과 마음을 좀 먹는다. 죽는 이들도 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뿐이다.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 사상자와 탈영병은 수도 없이 많다. 얼마나 많은 개죽음과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들이 그곳에 뿌려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대한민국 군대를 소재한 한 영화 중 '리얼리즘'이 돋보이는 영화는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다. 영화 쪽 말고 웹툰 쪽으로 눈을 돌리자면, <D.P 개의 날>의 리얼리즘이 돋보인다. <D.P 개의 날>은 군대가 가진 자체 모순을 가장 적확히 지적한다. 군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소위 '더티 플레이'라고 불리는 '군무이탈체포전담조'의 임무를 통해서 말이다.


대한민국 국군 900명 당 1명꼴로 매달 60명이 탈영을 한다. 많다면 많다. 적다면 적은 숫자다. 그들은 탈영하는 순간부터 군형법에 의거해 범죄자로 간주된다. 개인의 '동의' 없이 가둬진 곳에서 자유 의지로 벗어난 자가 사회적으로 비판받는다. 나약하다고 비난받는다. 낯설지만 익숙하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말이다.


탈영병들은 졸지에 D.P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들을 잡으러 가는 헌병대 D.P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김보통의 <D.P 개의 날>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보직에 열성인 D.P 안준호 상병의 하루하루 일과를 에피소드 형태로 보여준다.


안준호는 각자의 이유로 탈영한 이들을 쫓는다. 군인이면서 군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헌병이면서 머리를 기른다. 부대 밖을 형사처럼 돌아다닌다.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보직이다. 죽치고 시간만 보내도 되는 일이다. 안준호는 그 어떤 군인보다 사명감을 가지고 임무에 임한다. 그가 왜 그렇게 탈영병을 잡는 것에 열중하는 그조차도 의문이다. 탈영한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탈영을 결심했다. 돌아올 곳이 '분명' 필요하다. 당장이야 회피다. 결국은 돌아와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이 온전히 군대 안에서, 세상 밖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안준호 적당히 할 수 일에 적당히를 모른다. 그저 그 또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다. 그가 찾아주지 않으면 그들은 앞으로도 도망치며 살아야 하는 것은 하는 막연한 두려움, 탈영병들 또한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서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당연한 기시감 말이다.


그 생각 하나로 안준호는 '개'처럼 그들을 뒤쫓는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연인을 찾아 헤맨다. 탈영병들은 탈영한 이유도 제각각이다. 그들의 탈영한 이유를 뜯어보다 보면 군대의 서글픈 부조리가 보인다. 탈영한 이들을 옹호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나약하다고 힐난할 수는 더욱 없다.


단지, '자고 싶어서' 탈영을 했다는 이에게 그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혹, 영원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고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이들도 있다.


그때 생각했지. 아, 언젠간 잡히겠구나. 탈영은 공소시효도 없다고 하던데. 다시 또 파리를 먹이진 않겠지만. 결국 돌아가겠구나. 그래서 결심한 거야. 쫓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로.


군대를 전역한 절대다수는 군생활 기간 중 가혹행위를 당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가한 적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탈영을 경험하지 않았을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 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데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절대다수가 공감하는 몇 가지가 사실이 있다. 군대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 그들은 그곳에서 살아돌아왔다는 것, 군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군대는 변하지 않는다. 요즘 군대는 완전 당나라 군대 아니냐는 예비역들의 말은 그래서 무책임하다. 진짜 '현실'은 여전히 전 군에서 연평균 70여 명의 젊은 군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다. 수치상 0.1%의 사람들이 아닌 각각의 젊은 청춘들이 국방의 의무라는 되지도 않는 명목 하에 원치 않는 2년 동안 20대의 꽃다운 나이를 그곳에서 버틴다는 것이다. 그들 중 매년 70여 명이 그들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의 품으로, 형제의 품으로, 연인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그곳에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탈영이나 자살 사건을 직접 겪는 사람을 굉장히 드무니까 말이다. 그들은 쉽게 말한다. 우리 때는 안 그랬다. 군대 많이 변했다. 우리 부대는 안 그랬다. 요즘도 그렇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있다고 해도 오히려 구타유발자들이 문제다.


그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맞을만한 녀석이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 정신적으로 나약해서 견디지 못했다. 육체적으로 허약해서 버티질 못했다. 모두 다 옳은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군대라는 곳이 그런 이유로 사람이 죽어도 되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보이지 않으니깐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자신과 자신 주변의 고통이 아니고, 나약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편하니깐


우습게도 나도 그곳을 경험했다. 선임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다. 당한 그대로를 후임에게 돌려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가혹행위가 아닌 문화로서 당위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다. 또래에 비해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허약했다. 정신적으로는 나약했다. 그랬던 나는 군대에서 살아 남아 지금 버젓이 이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럽다. 내가 군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고작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만약, 키플링이 1895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