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스 엘프리메로 & 샤를 베르모 이야기
2016년에 알파고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네이버에서 AI를 검색하면 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불과 7년이 지난 2022년 말 발표된 챗GPT를 통해 AI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어떤 직업이 먼저 사라질 것인지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니스의 샤를 베르모(Charles Vermot)라는 워치메이커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확한 무브먼트를 만들어낸 최고의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계시장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업과 공장, 근로자들이 도퇴되는건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지금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샤를 베르모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했던 회사인 제니스 얘기를 먼저 해야합니다.
1962년, 제니스는 창립 100주년이되는 1965년을 목표로 역사상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이하 ACM) 개발에 착수합니다.
당시 ACM을 개발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형 반도체를 개발하는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시간을 측정하는 기능인 크로노그래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데 여기에 손목의 움직임으로 태엽을 자동으로 감아주는 오토매틱 기능까지 더하려면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기존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추가하는 쉬운 방법 대신 1/10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크로노그래프 전용 무브먼트를 만든다는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목표가 너무 높아서인지 100주년까지 작업을 완료하지 못했고, 이 소문을 들은 호이어(Heuer), 브라이틀링(Breitling), 해밀턴(Hamilton) 등이 연합한 크로노매틱 그룹(Chronomatic Group)과 일본의 세이코(Seiko)가 ACM개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크로노매틱 그룹은 1965년에 업체들간 연합을 시작하여 1966년부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세이코는 도쿄올림픽이 열린 1964년에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처음 선보였는데, 1965년에 바로 ACM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의 치열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969년1월10일, 제니스는 세계 최초의 완전 통합형 고진동 ACM인 엘프리메로(El Primero) 3019 PHC가 곧 출시될거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호이어의 CEO 잭호이어는 3월3일 제네바와 뉴욕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어 칼리버 11(Calibre 11)이 곧 출시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3월 바젤에서는 바젤월드의 전신인 바젤 스위스 견본전시회(Schweizer Mustermesse Basel)가 열려 모든 시계브랜드들이 기술을 뽐내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세이코 사장인 쇼지 핫토리가 잭호이어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인사를 건네며 얼마 전 기자회견때 발표한 Calibre 11의 기술적 혁신에 대해 축하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Seiko는 같은 시간에 이미 박람회에서 6139무브먼트를 전시하고 있었고, 호이어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해 5월, 세이코는 일본시장에서만 조용히 6139무브를 발표했습니다.
당시에는 시계를 국제적으로 출시하기에 앞서 남아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시장에서 먼저 테스트하는 단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마음이 급해진 크로노매틱 그룹은 8월에 칼리버 11을 글로벌시장에 발표합니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타이틀은 Calibre 11에게 넘어갔습니다.
우리의 El Primero는 9월에 출시됐습니다.
하지만 1969년에 발표된 3개의 ACM 중 El Primero가 진정한 ACM이었습니다.
Seiko 6139와 Calibre 11은 기존 무브에 크로노그래프를 얹은 데다 세계 최초 타이틀 경쟁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못하고 발표됐습니다.
Seiko 6139는 기술적으로 과감한 시도를 했으나 완성도가 상당히 떨여졌던 것으로 보여지며, Calibre 11은 기계적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 69년에도 수정된 모델이 나왔고 71년에는 생산을 중단하고 Calibre 12로 넘어갔습니다.
성능에도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El Primero는 36,000vph에 1/10초까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파워리저브는 50시간이었으며, 크기도 29.33mm x 6.5mm로 전통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보다도 얇았습니다.
반면 Seiko 6139는 27mm x 7.1mm 21,600vph, Calibre 11은 31mm x 7.7mm에 19,800vph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능과 완성도가 가장 떨어지는 무브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져간 것이죠.
이후에 르마니아(Lemania), 벨쥬(Valjoux)등 전통적인 무브먼트 강자들이 ACM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Valjoux 7750 (30mm x 7.9mm, 28,800vph)은 1974년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쿼츠파동으로 1975년에 벨쥬가 문을 닫았고, 다른 회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ACM의 생산 및 개발은 10여년 이상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블랑팡 매뉴팩쳐가 된 프레드릭 피게(Frederic Piguet) 가 1988년에 Cal.1185 (26.2mm x 5.4mm 21,600vph)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다른 브랜드의 ACM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El Primero를 능가하는 ACM은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제니스는 최초라는 타이틀과 상관없이 시계업계와 시계역사에서 인정받는 El Primero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이게 현재의 제니스를 만든 1969년 El Primero의 탄생이었습니다.
하지만, 1969년엔 El Primero만 탄생한게 아니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아폴로 11호’는 1961년5월에 케네디 대통령이 국회에서 했던 연설로 마무리 됩니다.
“믿음과 직감에 의존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득이 주어질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민 여러분, 휴스턴 관제센터에서 39만km나 떨어진 달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최고급 시계보다도 더 정밀한 기계로 가득 찬 높이 90m가 넘는 로켓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추진과 유도, 제어, 통신, 생존에 필요한 장비와 음식까지 모두 싣고 미지의 천체를 향한 전인미답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한다고 말입니다.
시속 4만km가 넘는 속도로 대기에 재진입하면 태양 온도의 절반에 가까운 열이 발생합니다. 아마 오늘 날씨처럼 뜨겁겠죠.
이 모든 일을 1960년대가 지나기 전에 누구보다 먼저 제대로 해내려면 우린 용감해져야 합니다.”
1969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정밀한 기계인 El Primero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대로 El Primero보다 정밀한 기계로 가득 찬 아폴로 11호가 인류를 달에 보냈습니다.
이는 증기기관으로 시작한 기계의 시대가 정점(Zenith)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이벤트였습니다.
그런데, 1969년엔 El Primero만 탄생한게 아니었습니다.
10월29일,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을 통해 최초의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원래 명령어는 “login”이었는데 “lo”두 글자만 전송되었습니다.
우연이지만 이는 1과 0으로 구성된 디지털 전자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12월25일에는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인 Seiko Astron이 발표되면서 쿼츠파동(Quartz crisis)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일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8.7.18.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Intel 설립
1969.7.20. 인류 최초의 달착륙
1969.08 Zenith El primero 발표
1969.10.29 인터넷(ARPANET)을 통한 최초의 메시지 전달
1969.12.25. 세이코 아스트론 발표, 쿼츠파동의 시작
1971. Intel,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텔4004 제작
1971 Zenith, 미국 전자회사 Zenith Radio Corporation에 매각
1972. 빌게이츠와 폴 알렌이 Microsoft설립
1973. Motorola,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 개발
1975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사 Valjoux 파산
1975 Zenith Radio Corp., Zenith의 기계식시계 생산 중단
1975 Kodak,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개발
1975.9 IBM에서 최초로 휴대용컴퓨터 5100 상용화
1976.4.1. 스티브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 로널드 웨인이 Apple 설립
1976 Zenith Radio Corp., Zenith의 기계식무브먼트 생산시설 폐기 결정
1977. 초기 PC인 Apple II가 판매를 시작, 상업적으로 성공
1978 Zenith, Zenith Radio Corp.에서 스위스 컨소시엄으로 매각
당시의 기술과 산업은 이미 기계와 아날로그를 중심으로 하는 ‘제2차 산업혁명’의 단계에서 전자와 디지털의 ‘제3차 산업혁명’의 단계로 전환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 컴퓨터,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등의 대부분이 이때 탄생했습니다.
쿼츠시계는 이 큰 흐름에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시계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첨단인 제품을 만드는 곳은 쥐라계곡에서 실리콘계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실리콘 계곡에선 수많은 반도체 회사와 컴퓨터 회사가 설립되었지만, 쥐라 계곡에선 무브먼트 회사와 시계회사들이 3-4일에 하나꼴로 파산하거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쿼츠파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부터 스와치그룹이 만들어진 1983년까지 스위스의 시계회사들 1천여개가 문을 닫으면서 600여개만 남았습니다.
업계 종사자도 9만명에서 2만8천명으로 2/3가 줄었습니다.
당시 스위스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50%였으니 다른 나라에서는 이보다 많은 시계회사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1970년에 Zenith는 다른 회사들과 연합하여 쿼츠무브를 개발하려고 시도했으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Zenith는 지난 8년동안 El primero를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는데 이를 회수할 수 없게 되자 경영 상태는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1971년, Zenith는 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의 전자회사 Zenith Radio Corporation으로 매각됩니다.
참고로 당시 Zenith Radio Corporation은 시카고에 위치한 라디오 생산업체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TV리모콘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Zenith Electronics로 명칭을 변경한 뒤 TV를 주력으로 생산했는데,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자산업의 중심이 아시아로 넘어가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99년엔 파산했습니다.
이후 LG전자에 인수되어 연구개발 기업으로 재편되었다고 합니다.
기계시대의 최정상에 올랐던 Zenith지만 디지털 시대에서는 한낱 낡은 기술을 가진 돈 못 버는 애물단지였습니다.
1975년, 미국 경영진은 기계식 시계의 생산중단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엔 무브먼트 제조에 필요한 장비와 재료들을 모두 처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Zenith는 Citizen으로부터 쿼츠무브먼트를 공급받아 시계를 만드는 처지였고, 가끔 기계식 시계를 만들 때는 ETA에서 무브먼트를 받아쓰는 회사가 되어있었습니다.
1978년, Zenith가 더이상 수익을 내지 못하는 와중에 Le Locle 지역에서는 시계산업과 일자리의 보전을 요구하자 미국 경영진들은 Zenith를 스위스 제조업체 컨소시엄에 매각해버렸습니다.
하지만 Zenith는 이미 직원 대부분이 떠나고 기술과 생산시설도 사라진 껍데기만 남은 회사였였을 뿐입니다.
1978년, 미국 전자회사는 물러가고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꿈꾸는 스위스 기업이 Zenith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는 기계식 시계에 대한 수요들이 조금씩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1982년 어느날, Rolex로부터 Daytona에 장착할 El primero 공급이 가능한지의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당시에 Rolex는 자사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없었기 때문에 Daytona에 Valjoux72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Paul Newman Daytona입니다.
하지만 Valjoux는 이미 1975년에 파산해서 없어졌고 무브먼트 재고는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Rolex는 이참에 Daytona를 현대화 하기 위한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찾던 중 El primero가 가장 뛰어나고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Zenith에 생산문의를 해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Zenith는 이미 관련된 생산시설과 자료를 모두 폐기하고 인력들도 떠나고 없는 상태였습니다.
기계식 무브먼트의 생산시설을 재건하더라도 그간 쌓아온 노하우와 핵심인력 없이 El primero를 다시 개발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고 성공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Zenith는 은퇴한 Charles를 찾아가 생산 재개를 위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Charles는 조용히 사람들을 이끌고 다락방으로 가서 벽을 허물고 비밀의 방을 보여줬습니다.
이를 본 Zenith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1986년, Zenith는 시설과 인력을 보강하여 El primero의 생산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Rolex와 Daytona에 맞게 36,000vph의 El primero를 28,800vph의 Rolex Calibre 4030으로 개조하여 공급하기로 하고 7백만 스위스프랑, 지금 돈으로 2,800억원에 해당하는 10년치 계약을 체결합니다.
샤를이 시카고에 보낸 편지의 예언이 맞았고, 이로써 Zenith는 다시 기계식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명가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1988년 바젤월드에서 Rolex는 오토매틱 데이토나를 공개헀습니다.
Zenith Daytona라고 불리는 이 모델은 2000년에 Rolex가 El primero를 기반으로 만든 자사 무브먼트 Rolex Calibre 4130으로 교체하기 전까지 12년간 생산되었습니다.
1999년, 브랜드의 역사와 전통을 가장 중요시하는 LVMH가 Zenith를 인수합니다.
이 M&A를 주도한 사람은 Christian Viros라는 사람인데, 이 전에 TagHeuer를 구조조정과 마케팅으로 살려내면서 LVMH그룹의 시계 및 주얼리부문 사장이 된 인물입니다.
LVMH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생기면서 Zenith는 El primero를 중심으로 고유의 색깔을 찾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Zenith의 부활에는 Rolex와 LVMH의 도움이 컸지만 샤를 베르모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브랜드들이 마케터의 손으로 부활했다면 Zenith는 진정한 워치메이커의 손에 의해 부활했습니다.
살아보면 샤를의 말대로 인생에는 변덕스러운 순환이 있습니다.
El primero를 수확하는 가을이 지나니 쿼츠파동 같이 추운 겨울이 옵니다.
뭘 해도 안되는 이 겨울을 잘 견뎠더니 Rolex의 봄이 오고, LVMH의 여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El primero의 가을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언젠가는 겨울도 다시 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