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맨(2) : 에어맨 디자인의 기원
그런데 글라이신이 4개월만에 이런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글라이신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미 1937년에 Philip Van Horn Weems와 론진이 항공항법용으로 개발한 Second-Setting Watch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참고로 Weems는 미국 해군 장교로서 항해법을 바탕으로 항공항법을 개척하고 Lindberg에게 항법을 가르쳤으며 1930년에 세계 최초의 시계 회전베젤을 개발한 인물입니다.
A-11 Weems모델이라고 불린 이 디자인은 에어맨의 특징인 회전베젤과 베젤클램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계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에 맞게 디자인이 개선되어 RAF MK VIIA 6B/159라는 제식 명칭을 부여받았으며, Longines, Zenith, Omega, LeCoultre, Movado를 통해 약 7천개가량 생산되어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폭격기의 네이게이터 시계로 활용됩니다.
어찌보면 에어맨은 그저 2차대전에 사용되던 항공시계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스틸느낌을 그대로 살린 회전베젤이나 베젤클램프같은 요소들을 통해 2차대전의 감성들을 느낄 수 있지만요.
하지만, 제록스의 GUI와 마우스가 애플에서 꽃을 피운 것처럼, 더 살펴보면 글라이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의 멀티타임존 시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은 1946년 제작된 글라이신 Triple Date입니다. 흰색 다이얼 가장자리에 요일, 안쪽 베젤에는 날짜가 새겨져 있고 한달이 지날 때 마다 10시 방향의 크라운으로 날짜와 요일을 조정하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풀캘린더 시계는 월, 날짜, 요일을 서브다이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시계는 다이얼의 가장자리를 이용해서 한 달 치의 요일과 날짜를 보여주고 있어 가독성도 뛰어나고 달력을 보듯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글라이신은 이미 다이얼과 베젤을 이용해 복잡한 정보를 다루는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 항공시계를 GMT시계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는게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성공한 GMT시계는 에어맨보다 1년 늦은 1954년에 출시된 롤렉스 GMT-Master였습니다.
롤렉스는 당시 세계 최대의 항공제국을 건설한 팬암과 손잡고 항공사 파일럿들을 위한 시계를 만들었는데, 24시간계를 사용하는 에어맨과는 달리 GMT핸즈를 따로 두는 방식으로 12시간계와 24시간계의 조화를 이뤄 일반인들의 수용성이 훨씬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렉스 같은 대기업에 비해 구멍가게에 불과했던 글라이신의 에어맨은 출시가 되자마자 민간항공기와 군용항공기 파일럿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50~60년대에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합니다.
다른 시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24시간계 GMT라는 기능적 측면도 성공 요인이었겠지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네비게이터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도 파일럿들에게 감성적인 어필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