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it Jan 07. 2024

에어맨은 쓰러지지 않아 IV

에어맨(4) : 글라이신의 몰락




100년의 역사, 세계 최초의 GMT, 베트남전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시계, 제미니 프로젝트에서의 우주 비행...


이 정도 컨텐츠를 가진 브랜드라면 지금쯤 레이싱 크로노그래프로 명성을 날린 호이어나 달나라를 여행한 오메가급은 되어야 했지만 글라이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글라이신은 2010년대 초반부터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2015년 기준으로 직원이 8명까지로 줄어들더니


2016년에는 인빅타라는 저가형 쿼츠 브랜드에 인수되어 글라이신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경악케 했습니다.




이후 홈페이지는 멈췄고, 오프라인 매장은 사라졌으며, 2천달러가 넘는 시계들이 한때 5~6백불에 풀리면서 시장에서 떨이 내지는 미끼상품 취급을 받는 그런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Glycine Watches SA의 소유자 연혁을 봤습니다.


1914 - 1916 Eugène Meylan 

1916 - 1924 Eugène Meylan and Piccola & Jofrette 

1924 - 1943 Fernand Engel d'Eggiwil

1943 - 1965 Charles Hertig d'Evilard 

1965 - 1984 Charles Hertig Jr & Samuel Glur

1984 - 2011 Hans Brechbuhler 

2011 - 2019 Stephan Lack ('13-'15 DKSH, '16-'19 Invicta Group)

2019 - current, Invicta Watch Group 



70~80년대는 쿼츠파동으로 기계식 시계브랜드들이 망해나가던 시기였는데 글라이신은 그 시기를 잘 버텼고, 


이후에는 전통적인 워치메이커인 Hans가 이끌면서 고집스럽게 글라이신의 전통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2010년 Hans가 사망하면서 글라이신의 소유권이 변경될 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2000년대는 시계브랜드들의 합종연횡의 시기였고, 전통있는 많은 브랜드들이 SWATCH, LVMH, Richemont같은 큰 우산 밑으로 모여 살아남거나 사라지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투기적인 자본들은 전통적인 브랜드를 인수하고, 전성기때의 시계를 복각+역사책을 편찬해 회사를 섹시하게 포장한 뒤, 큰 우산을 든 그룹들에게 비싼 값으로 넘기는 사냥을 했습니다.


2013년에 에어맨 60주년, 2014년 글라이신 100주년을 앞두고 있던 글라이신은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2011년 회사를 인수한 Stephan Lack은 2013년에 에어맨 60주년을 맞아 에어맨 1953 빈티지 한정판으로 발매하고, 2014년엔 에어맨 초기모델을 복각한 No.1을 발매함과 동시에 “Glycine Airman : Play it again Sam!”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엔 Invicta에 글라이신을 팔았구요.



문제는 이 기간 동안 회사가 발전과 혁신은 없이 겉치장에만 집중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회사 로고를 둘러싼 소송전입니다. 


글라이신은 1967년부터 왕관 로고를 사용해 왔는데, 2015년에 뜬금없이 왕관에 날개를 달아 목이 잘린 독수리 같은 로고를 만들더니 아르마니 측으로부터 모양이 비슷하다고 소송을 당한 것입니다. 


2018년 말 내려진 결론은 글라이신은 로고를 원래대로 변경하고 아르마니에 피해보상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그 이후에 만들어진 제 시계에서는 두 가지 로고를 다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회사를 말아먹은 Stephan Lack이 물러나고 인빅타가 직접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직까지 눈에 띄는 성과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글라이신이 몰락한 원인에는 투기꾼의 농간도 있었지만, 애초에 글라이신이란 회사가 현대적 경영시스템이 없는 작고 약한 회사란 점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확장성이 약한 24시간계 에어맨 하나에 너무 오랫동안 의존해왔던 점, 예전부터 시계만 잘 만들면 됐지 하는 마인드로 마케팅을 등한시했던 것도 결과를 이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브랜드가 사라지지는 않았고 글라이신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다른 인빅타와의 조합에는 논란이 많지만 에어맨이라는 DNA가 살아남았다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워낙 컨텐츠가 탄탄하니 언젠가 좋은 경영자를 만나면 다시 날아오르겠죠.  


제목 그대로 ‘에어맨은 쓰러지지 않아’(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에어맨은 쓰러지지 않아 II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