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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가고 여름

by zena


도시에 비가 찾아왔다. 축축함이 온몸을 짓누른다. 눈앞은 아슴아슴. 매일 걷던 길이 멀어진다. 언젠가부터 비는 부슬부슬 내리지 않고 퍼붓는다. 다시는 세상에 내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하듯 세차게 이 도시를 때린다. 지붕이 없는 도시의 건물들. 비밀을 품은 문들도 내 힘으로 열기엔 역부족이고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삼천 원짜리 우산이 앙- 하고 부러질까 봐 양손으로 붙든 채 걷던 그 자리에 잠시 서서 번지고 퍼지고 흔들리는 빗줄기들을 눈으로 좇는다. 비들도 갈 길을 잃은 모양이다.


비가 해를 몰고 왔다. 강렬한 햇볕은 빛과 어둠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둠에도 빛이 담겨 모두가 그 어둠을 선명하게 본다. 한낮에도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만 움직인다. 빛 속엔 세상이 새하얗게 넘쳐서 사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이 계절엔 사람이 없다. 바싹 마른 껍데기들의 동태를 어둠 속에서 살핀다. 제각기 사람들이 똑같이 오고 간다. 당신들은 너무 지겹고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나는 어둠 속에만 있다. 분명 밖으로 뱉었는데 안으로만 쌓이는 말들은 침처럼 닦아 내야 할 오물이 되었다. 이 오물들도 어둠을 벗어나면 새하얗게 타버리고 말까. 그렇다면 저 빛들은 다 오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참이나 한다.

걷기로 했다면 목적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단번에 볕 속으로 몸을 던져 지칠 때까지 걷기. 땀에 옷이 흠뻑 젖는 것도 얼굴이 벌겋게 익는 것도 괜찮다. 여긴 둘레길이 아니고 처음 와 본 도시는 더더욱 아니며 빛바랜 동네와 골목이 이어지는 나의 세계다. 그러나 나는 던져지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던졌고 마치 처음 와본 것처럼, 부러 이곳을 여행지로 택한 사람처럼 낯설게 움직인다. 어떤 것도 자세히 보지 않고 지나쳐버리는 나는 이 계절에 어긋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걷지만 걷는 게 아니고 돌아갈 곳이 있는 이방인일 뿐이다.

여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여름은 냄새의 계절이다. 바람에도 비에도 더디 오는 밤에도 물기를 한껏 담아 눅눅하고 찐득한 여름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그런 밤이 이어지면 어느 날은 잠이 달아나고 미지근한 방바닥에 누워 눈만 감은 채 어둠을 입은 담쟁이덩굴을 손으로 훑는 상상을 한다. 상상 속의 나는 여름에 푹 잠겨 끈적끈적한 그곳을 떠돌아다닌다. 지겨웠던 밤이 그때만큼은 선명해지고 나의 순간이 영영 이어질 것 같아 아무래도 다 괜찮을 것만 같지만 나는 이 계절의 요란스러움을 안다. 마음대로 퍼붓고 쏟아지고 짓눌러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은 건 여름이 가고 다시 여름이라는 사실 하나뿐이고 나는 여전히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게 여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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