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생기면 일과를 적는 노트에 기록하거나 달력에 표시한다. 그리고 하루에 몇 번씩 머릿속으로 ‘몇 월 며칠 몇 시 누구와 약속’이라는 문장을 반복적으로 저장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세 잊고 마는, 기억력이 꽤 나쁜 편이므로. 상대의 나이와 이름도 잘 잊어서 분명 얼굴은 낯이 익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아는 체하지 못하거나 상대가 아는 체를 해오면 몰래 식은땀을 흘리며 어서 이름이 떠오르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많다. 용기를 내 ’ 죄송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라 물으면 될 텐데 굳이 ‘OOO 님이셨죠?'라고 때려 맞추듯 물어 대부분을 틀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더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뱉은 말, 썼던 글들도 당시엔 정말 진심이었을 텐데 내가 정말 그런 멋진 말을 했다고? 싶은 말들도 새까맣게 잊고 반대로 그런 말은 절대 했을 리 없다 싶은 말도 부지기수로 뱉었다는 걸 누군가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다. 또 오래전 썼던 글들을 다시 읽을 때면 낯선 이를 처음 마주한 심정이 되고 반복적인 문장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등장할 때면 생각의 빈곤, 마음의 빈곤이 드러나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말을 하면 자주 허무해지고 쓰는 행위는 주저하게 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너무 아픈 기억도 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공포나 불안, 슬픔 같은 감정이 너무 강하게 다가오는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을 최대한 깨끗하게 지워버리거나 그런 상황에 놓이게 만든 상대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만들거나 그 사람에 대한 나쁜 기억을 지워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다. 그런 체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기억이 없으니 그렇게 대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 마치 ‘어? 이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 잊을 수 있을 정도인가 보지’ 하는 것이다. 애써 잊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기억하는 것이 수용 기능이라면 나는 아직 많은 것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면 부디 내 진정성만은 의심하지 않길 바란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에게 모든 게 진심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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