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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Jan 30. 2021

꼬마 친구는 말했다

얼마예요?     


 아침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책방으로 꼬마 손님이 들어왔다. <메이플스토리(모험을 떠나는 학습만화 시리즈물)>를 찾는 걸 보면 3학년에서 5학년 사이의 친구다. 얼마냐고 묻길래 권당 2천 원이라고 말을 해준다. 찾는 번호가 있다며 내게 몇 번과 몇 번이 있냐고 물었다. 일반 서점에 가서 책을 찾으면 으레 찾아주는 서비스에 익숙한 듯 뒷짐 지고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조금 얄미워서 여기는 같이 찾아보는 시스템이라며 눈 크게 뜨고 찾아보라고 했다. 녀석은 나를 놀리는 건지 정말 말을 잘 듣는 건지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찾았다. 확실히 얄밉다. 찾는 번호가 있었던지 세 권을 골라 꺼내 들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멈춰 선 꼬마 친구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왜? 

-다섯 권이면 만원이니까 두 권 더 고를게요     


 조기교육의 실패로 사는 내내 산수가 약한 나는 갑자기 훅 들어온 꼬마 친구의 합리적 판단에 멈칫했다. 굳이 헤아려 보지 않아도 곱셈만 하면 나오는 계산인데 늘 산수에 긴장감을 가지고 살다 보니 멈칫거리는 것도 습관이 된 것 같다. 조금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아… (세 번 정도의 멈칫 끝에) 그렇지, 만원이네 미안하다 이모가 산수를 잘 못 해 하하하   (나는 정말 부끄러웠고 이상하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들어올 때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를 위로한다. 그러곤 몇 마디를 더 부친다. 아빠 회사가 근처인데 볼 책이 없어서 책을 사려는데 중고책은 더 싸니까 여기로 왔다. <메이플스토리>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책인데 집에는 몇 번과 몇 번이 있으며, <마법 천자문>은 본 적이 있다, 몇 번과 몇 번은 빠졌으니 그 번호를 꼭 구해달라 또 들르겠다 등등등. 마치 책 세계의 도꾸이 (단골이라는 일본말로 책방에서 좋은 책을 꾸준히 찾으러 오는 사람들을 으레 그렇게 부른다) 가 업자에게 한 수 가르치는 불꽃 튀는 장면을 연출한 뒤 나의 꼬마 친구는 쿨내를 풀풀 풍기고 떠났다.      


그럴 수도 있지       


 내 친구의 친구의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저 말을 마음에 새긴다고 한다. 그러면 화낼 일도 힘든 일도 없다고. 오랜 세월 볼꼴 못 볼 꼴 다 겪으며 깨달은 깊고 진한 명언을 열 살 (혹은 열두 살?) 꼬마 친구에게 들을 줄이야. 살면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은 나이순도 아니고 성별 순도 아니고 학벌, 경제력 순도 아니며 경험 순이지 싶다. 꼬마 친구의 경험의 세계가 궁금하고 부럽다. 산수를 잘하는 것도 부럽다.      


그럴 수도 있지      


 자꾸만 짜증이 난다.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잡으려 하는 건 아닌지 두렵고 불안해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어딘가에 닿을 것만 같은데 그 한 발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나만 멈춰있고 죄다 멀리 갔다. 그런 나날들 속에 만난 꼬마 친구의 위로가 친구의 친구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게 하며 나를 달랜다. 그럴 수도 있지, 맞아.... 그럴 수 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쩌겠나 오늘은 이 작은 위로가 나를 나아가게 하니 오늘만큼은 그럴 수 있는걸로 하는 수밖에. 메이플스토리 빠진 번호 챙겨 놓았으니 어서 찾으러 오렴, 꼬마 친구야


<이미지출처>https://m.blog.naver.com/1982ljy/70160187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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