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졌다.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나는 이모티콘에 빠져버렸다. 나란 사람, 35년을 넘게 살면서 싸이월드 도토리 사서 미니미 꾸미는 걸 아주 한심하다 생각했고, 각종 게임 아이템 사는 인간들을(?) 보며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철부지로 업신여겼다. 당연히 카카오톡 이모티콘 또한 같은 이유로 돈이 문제가 아니고 의미가 없다며 시도 때도 없이 혀를 쯧쯧거렸다. 그런 내가 이모티콘에 중독된 건 운명인 건가 (응, 아니야 ㅎ) 일적으로 만난 사람과 일적으로 카톡 대화를 나누는데 상황이 좋지 않았고 나는 빡쳤다. 정말 빡친다는 표현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그대로 감정표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하고 넘어가기엔 내 마음이 너무 빡친 상태였다.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알고 있는 단어로는 마음의 화를 전달 할 수가 없었다. 되는대로 자판을 눌러대다 이모티콘 화면으로 들어갔다. 선물 받은 이모티콘이 눈에 들어왔다. 낯간지럽기도 하고 딱히 쓸 이유를 몰라 방치 상태였는데 우연찮게 눌러진 이모티콘 목록에 욕 같지 않으면서 욕 같은 게 눈에 띄었다. 굽신거리는 느낌의 캐릭터로 말에는 겸손이 있는데 모습엔 비아냥이 섞여 있는, 아주 절묘한 느낌의 이모티콘이었다. 이것이다! 나는 빛의 속도로 입력을 두드려 댔다. 타다- 타다닥.
뭡니까.
뭐긴요, 이모티콘이죠. 라고 하진 못하고 요즘 빠져 있는 이모티콘인데 병맛 인게 귀여워서요- 라고 돌려 깠고 그 사람도 내 의도를 알았지만, 캐릭터가 너무 귀엽기도 했고 딱히 어떤 말을 한 게 아니다 보니 기분 나쁜 티를 내진 못했다. 나는 바로 개중에 가장 귀엽다고 느껴지는 것을 골라 하나 더 보냈다. 갑자기 냅다 이모티콘만 발사하는 내가 다양하게 웃겼는지 전엔 한번도 쓰지 않았던 ㅋㅋㅋ 를 보내왔다. 나도 ㅋㅋㅋ로 응수했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누구씨- 로 시작하여 ㅋㅋㅋ로 나름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안녕하세요, 이모티콘입니다.
겸손하고 재치있고 욕도 잘하는 이모티콘에 빠져버린 난, 누구 할 것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두에게 이모티콘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누구라도 이모티콘 한 방이면 대화 분위기 자체가 부드러워졌다. 자꾸 쓰다 보니 이모티콘이 나를 닮았다며 그 정도면 부캐 (부 캐릭터) 라고도 했다. 나도 왠지 닮은 거 같아서 마치 내가 만든 것인 양, 어깨가 으쓱했다. 정확한 기분을 표현할 순 없지만 또 하나의 자아가 생긴 것 같았다. 그야말로 부캐였다. 자꾸만 사고 싶었다. 내 기준으로 누군가 더 센스있는 이모티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 이대론 안된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더 세밀한 감정과 대사를 표현 할 줄 아는 친구들이 필요했다.
한 달에 하나 이상을 사기엔 과한가 싶어 생일이나 특별한 날들을 핑계 삼아 언니 찬스, 엄마 찬스, 지인 찬스를 써가며 새로운 부캐를 찾아 헤맨다. 이 정도면 사냥이다, 사냥, 이모티콘 사냥꾼.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은데 무시할 수 없는 카톡과 메시지들이 마구 온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소통을 차단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진정성 없이 마구잡이로 손가락 운동만 할 수는 없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모티콘 창으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사냥을 하나 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신나게 대화를 나눠야겠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사냥하러 갑니다
*이미지출처) 지오피스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