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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Feb 07. 2021

이름은 이름인데

내 이름은 남자 이름이다. 


 요즘 시대에 구시대적인 발상이긴 하나 나는 80년대에 태어났고, 그땐 내 이름이 철수, 민수, 영호, 같이 남자아이에게만 쓰는 이름이라는 게 있었고 엄마는 막내딸인 내게 그런 이름을 주었다. 태몽 탓도 있다. 나의 태몽은 용이 나르거나 돼지가 품에 안기거나 보석과 과일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이름이 지어지는 꿈이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엄마의 꿈에 나타나 OO이란 이름만 지어주고 사라지셨다. 엄마는 당연히 아들이라 확신했고 드디어 아들 없는 서러움을 씻어내나 했겠지만, 나는 떡하니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여자아이가 좀 잘생기게 태어난 데다 이름까지 남자아이를 떠올리게 하다 보니 어릴 적 어딜 가든 아들이 참- 잘 생겼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다. 짧은 머리에 먹성까지 좋아 밥 한 공기는 그 자리에 뚝딱 하는 나를 보며, 그 누구도 내가 여자아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고 엄마도 딱히 그들의 생각을 고쳐주지 않았다. 먹는 즐거움이 크다 보니 나조차 딸이든 아들이든 무슨 상관인가 싶어 잘 먹고만 다녔는데, 학교 입학을 하고부터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나 나의 초등학생 시절은 출석을 부르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학교생활의 첫 관문이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내가 대답을 하면, 교실 안 공기의 흐름이 잠시 멈추면서 모두 나를 돌아봤다. 남자 이름에 여자아이 목소리의 부조화가 그들에겐 작은 놀라움이었다. 나는 그런 시선이 불편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남자 이름이네- 선생님들은 모두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말을 뱉곤 했다. 그러고는 그렇게 발표를 많이 시켰다. 당번이거나 그날이 며칠이냐에 따라 걸리는 게 보통인데, 나는 남자 이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주 불려 나갔고 자주 혼이 났다. 고개를 숙이거나 먼 산을 보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학교 밖으로 탈출해도 상황은 비슷했다. 병원을 가거나 학원, 각종 새로운 곳에 이름을 알려야 할 때마다 나는 내 이름을 여러 번 말해야 했다. 설마 네 이름이 그 이름은 아니겠지. 라는 표정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내가 아무리 발음을 또박또박 말해도 그들은 늘 흐릿하게 알아들었다. 민수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미수 거나 민순이거나 민선이거나로 찰떡같이 틀리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래도 몇십 년을 살다 보니 익숙해져서인지 사람들이 내 이름을 어색해해도 그러게요,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며 너스레를 떠는 수준까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시간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연애 시절이었다. 남자 친구가 생기고 그들이 아무리 나를 사랑스럽게 불러도 도무지 형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상해봤다. 결혼식에 사회자가 신랑 신부 입장을 외칠 때 주례가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말할 때 신랑 김민수 군과 신부 김철수 양의 어쩌고 저쩌고를. 정말 생각도 하기 싫었고 상상은 아예 되지도 않았다. 나는 개명을 결심했다. 판사님도 고충을 아셨는지 구구절절한 나의 사연을 듣고 개명을 허가해 주셨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인 구청 신고를 앞두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버렸다.     


 개명을 한다고 했을 때 알아서 하라던 엄마는 막상 허가가 떨어졌고 신고만 하면 된다고 하니 섭섭함을 드러냈다. 바꾸라고 한 게 아니라 그래, 한번 바꿔보든가 말든가 네 마음대로 살아라- 였다는 걸 신고서를 받은 후에야 알게 된 셈이다. 효심 같은 건 별로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꿔선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렇게 소망하고 열망하는 개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불러주지 않는 이름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발길을 돌린 후엔 아직까지도 네- 제가 셋째 딸이라서요. 네- 제 태몽이 대단해서요. 네- 남자로 태어났으면 크게 됐을 텐데요 껄껄껄. 하는 재미없는 레퍼토리를 내뱉으며 살아가는 중이다. 하늘이, 구름이, 별이, 미미.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는 이름들이 친근하고 좋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하늘이 할머니, 별이 할머니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 남자 친구가 달콤하게 구름아, 미미야. 라고 불러주는 상상도 해본다. 이번 설에 엄마를 만나면 넌지시 물어보고 단호하게 결정해서 몇 달 후엔 브런치 작가 구름씨, 하늘씨, 별씨, 미미씨가 되고 싶다. 쓸데없는 효심은 좀 버리고. (효심이라 할 수도 없다 그저 섭섭함이고 익숙함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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