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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Feb 10. 2021

나랑 같이 살자


스투키가 말라버렸다     


 그래도 식물은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도 주고 말도 걸어주고 가끔 햇볕도 쐬어주고 했건만 스투키도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나는 뭐든 잘 키우지 못한다. 어릴 적엔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으나 털이 날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엄마로 인해 시도조차 못 해봤고 진돗개에게 쫓긴 경험을 한 후론 나도 생각을 접었다. 한 번은 토끼를 어디선가 데리고 왔는데, 당장 다시 돌려주고 오라며 엄마가 빗자루를 거꾸로 드는 바람에 부리나케 뒷산에 토끼를 풀어버렸다. 그땐 그 토끼가 산토끼일 거라는 확신으로 그런 행동을 했지만 사실 순간을 회피하고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한 잘못된 행동이었다. 토끼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은 귀찮고 어쩌면 두렵고.     


 함께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걸 사람을 통해 배우다 보니 피곤함이 커질 때마다 혼자인 게 편했다.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남은 자꾸 마음대로 하고 싶고, 그 남이 동물이나 식물이 되면 의사소통에 있어 더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야말로 공존 불가능이다. 그들은 내게 나의 언어로 말해주지 않는다. 똥도 마음대로 싸고 자꾸만 밥을 달라고 하고 썩어가고 말라버린다. 힘든 것들만 남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진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게 서로에게 좋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게 생각보다 외롭다.     


 독립을 하고 원룸에 살기 시작하면서 숨이 막힐 때가 종종 있었다. 펜스가 높게 쳐진 창문을 볼 때나 침대에서도 현관문이 너무 가까이 보일 때, 의자에 앉아서만 이동해도 집안 어디든 갈 수 있을 때마다 나는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런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심리적인 문제라는 뻔한 현상 해석만 하거나 그럼, 거길 나오면 되지- 라는 나도 이미 알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답 아닌 답을 내게 답이라고 말해주었다. 문제와 답 모두 내가 알고 있고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엄마 집에 간 날 베란다에 엄마의 친구들을 봤다. 조금 과장해서 정원 수준이었고, 거기엔 죽을 것 같아서 급하게 엄마 집으로 보낸 호야도 있었다. 거의 이파리가 남지 않은 상태로 바짝 말라 있었는데 엄마 곁에선 많은 잎들이 윤이 나고 아주 단단하게 뻗어 있었다.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적어도 혼자는 아니구나 느꼈다. 살아남고 싶고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가족을 들이기로 했다. 키우기 싶고, 손이 안 가는 그런 조건 말고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않는 선에서, 시선을 맞추고 다른 언어라도 소통하며 그저 곁에 있어 준다고 서로가 느끼도록. 나는 엄마의 정원에서 한 친구를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어떤 친구가 올지, 그 친구가 나랑 살고 싶을지 잘 물어봐야겠지만, 이번엔 너를 외롭게 하거나 나를 외롭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랑 같이 살자.



*이미지출처

https://m.blog.naver.com/u-jungnara/22221432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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